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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秘史열전] 노경규, 그는 누구인가?
  • 일간투데이 류재복 대기자
  • 승인 2017.06.2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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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규 씨

 

1970년에 야당인  신민당 동래지구당 선전부장으로 출발

링겔과 주사바늘 빼 버리고 민주회복 위해 활동 

2017년 5월 13일 토요일, 기자는 재야인사로 유명했던 노경규 前 김대중 대통령 비서를 그의 연구실이 있는 비산동에서 만났다. 현재 금년내 출판을 목표로 회고록에 집필에 여념이 없는 그를 기자가 처음 만난것은 1985년 9월이었다. 당시 프레스센터 1402호 한국교열기자회 사무국장이었던 기자를 찾아와 "김대중 선생님께서 류재복 동지를 찾습니다"라면서 기자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런 사유로 그와 인연을 맺었다가 중간에 행방불명으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기자가 운영하는 <류재복기자의 취재일지>에 실린 <김대중대통령과의 만남>이란 글을 보고 지난해 기자에게 연락이 돼  다시 그와 재회가 된 것이다. 이날 기자는 노경규 전 김대중 대통령 비서로부터 그의 파란많은 생을 들어보았다.

노경규는 대학 생활중인 1961년경   부산 동래 다리와 온천다리 밑에서 2년간 넝마주이 생활을 했다.  그는 1970년 야당인 신민당 동래지구당 선전부장으로 출발,  다음해 4월 27일 대통령 선거 (박정희-김대중)를 거치면서 反독재 군사정권 타도의 험난한 골수 야당인의 길로 들어섰다. 1972년 부산시지부 훈련부장으로 부산 각 지구당의 야당 당원들의 교육, 훈련을 맡고 있을 때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그땐 정말 숨막히는 터널속의 세월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저 달의 뒷면 같이 차갑고도 캄캄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1974년 8월15일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여사의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나름대로 뼛속까지 야당성으로 무장되었던 그였지만 그는 이때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안보, 전방 철책선,  김일성이 마음에 들어와 정신적 혼돈이  나를 엄습했다. 그러나, 유신체제에 대한 전국적 저항운동은 멈추지 않았고,  드디어 1974년 11월 27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민주회복국민선언을 하면서 이 땅의 유일한 국민운동의 모태인 민주회복국민회의가 결성되고 反유신 독재투쟁의 횃불이 올랐다."고 말했다.

이러한 全국민적 저항에  박정희 정권은 1975년 초 유신의 찬반과 대통령의 신임을 동시에 묻는 국민투표를 제안하게 되고  이에 저항하는 국민운동은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전국적 지부결성과 함께  국민투표 반대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부산 경남은  어느 누구 한 사람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다른 지역보다 더욱 간교하고도 혹독하게 탄압되어  민주회복국민회의 부산, 경남지부 결성이 전국에서 제일 늦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이때 나 역시 건강상의 문제로 매일 링겔을 꼽고 있어야 하는  최악의 상태에 있었으나  주사바늘을 빼버리고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부산 경남이 무너질 수 없다는 심정뿐이었다.  비가 오면 나는 항상 활동했다.  정보과 형사들 감시의 틈이 느슨한  부산의 비바람이 치는 날은 제가 조직활동을 하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말했다.

 

국민회의 부산경남지부 은밀하게 결성후 동교동 김대중씨 만나 직접전달 보고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부산경남 회원은  당시 김정한과 노경규 2명뿐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국민회의 부산경남지부를  당시 야당 영도지구당사에서 은밀하게 결성하고는 그 결과를 그가 직접 상경하여 김종완씨(민주헌정연구회 이사장 역임)와 함께 동교동 김대중씨를 만나 전달, 보고 했다.  그때 문학가 요산 김정한 선생의 친서도 같이 전달했다.  당시 부산경남에서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 멤버는 요산 1인 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국민회의의 부산경남 조직이 늦어진 내용과 부산 경남은 국민투표 반대가 아니라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지역임을 설명하니까 김대중씨는  “결과적으로 아주 잘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지금부터는 오히려 “국민투표 무효선언운동”을 해야 할 형편인데 부산 경남이 전국에서 제일 먼저한 결과라고 칭찬한 것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말했다.

이즈음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회원은  부산경남에서는 요산 김정한 선생과 노경규 두 사람밖에 없었고 이후 엠네스티  부산경남지부의 지부장 김광일 변호사, 전무이사 노경규와 조태원, 김영일 간사 등과  일하면서 운동의 외연을 확대해 나갔다 , 동아, 조선일보 광고탄압 사태도 이때 일어났다.  당시 부산경남 지역의 엠네스티 활동을  이용한 민주화운동 방향은 요산,  김광일 변호사와 노경규가 결정하였다. 이렇게  1974년과 1975년은 민주회복국민회의,  엠네스티, 동아,조선 광고탄압 사태 등이 맞물려 돌아가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이후, 민주회복국민회의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등으로 발전적 해체를 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져 나아갔다. 1976년 서울에선 3.1 구국선언이 있었고, 바로 김대중씨의 옥중성명서가 발표되게 되었다. 당시 노경규는 구국선언문과 옥중성명서의  부산경남 배포사건으로 1977년 5월경 동래경찰서에서 9일간 거의 잠을 재우지 않는  철야조사를 당했다.  6월초 불온유인물 제작살포 및 反정부 불온단체 조직 음모 (부산 경남의 재야조직) 라는  긴 이름의 혐의로 중앙정보부 부산분실 (대연동) 지하실로 연행되어  혹심한 고문과 폭행을 당하면서 몇번의 의식을 잃는 등  인간 이하의 모욕적 대우를 받았다.

 

1979년 3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첫 부산교도소 수감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전국 1차  지명수배로 도피생활 계속

그 후 노경규는 부산대학교 후배 조태원과 함께  1979년 3월 경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부산교도소에서  첫 감옥생활을 하게된다. 당시를 떠올리면서 그는 "부산 재판과정의 법정투쟁에 저를 응원해주시던 김광일, 이흥록, 홍남순 변호사, 심응섭, 임기윤, 최승묵 목사, 송기인, 오수영 신부 등과 부산 경남의 동지,  후배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전국 1차로 사진 지명 수배를 받으면서 1년간의 도피 생활과 감옥 생활을 거쳐 2년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후 또 다시 명동성당에서 백기완씨, 한영애 씨등과 함께  군중선동혐의 집시법 위반으로 입건  투옥되었다가 1987년 6.29선언 후  석방되었다."고 말했다.

노경규는  김대중 씨와 헤어진 이유를  설명했다.  "나하고 김대중씨와의 결별은  그가 정권을 잡기 훨씬 전인 평민당 시절  大選 즈음이었다. 어쨌든 나는 김대중씨와의 민주화운동과정에서  그의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한 솥밥을 먹던 비서로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기 때문에 정치 前科(전과) 4범이 된 것이다. 김대중씨와의 관계에서  개인적 뒷이야기들은 따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젊은 시절 나의 정치적 소신과 한 정치 지도자와의 관계에서 나의 소회는 너무나 절망적이고 세상 사람들의 상당 부분이 이해 못하고 있는 데 대해서  참담한 심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경상도 사람으로 전라도 사람인 김대중 씨를 모시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던 나는 한번도 지역감정을 가져 본 적이 없지만 정치인 김대중, 인간 김대중에 대하여는 환멸을 느꼈다. 1987년 온 국민의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져 김영삼, 김대중이 단일화만 되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맞고도  4자 필승론을 내놓으면서 한편으로는 '김영삼 씨가 양보하지 않으면,  내가 양보해서라도 단일화 한다”고 끝까지 말하다가 '나는 이번에 아니면  나이가 많아서 다음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는 김광일 변호사와 나는 동교동 문을 나서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고, 대선 패배 후 느닷없이  컴퓨터 부정 운운 할 때는  인간적 혐오감마저 들었다."고 밝혔다.

 

"김대중씨와의 결별은  너무나 환멸을 느꼈기에...."

"아들들이 비리로 줄줄이 감옥 갈 때  그 배신감 이루 말할 수 없어"

 그는 또 "특히, 김대중 정부 하에서  전국의 피를 토하듯 외치며 싸워온 민주화운동의 동지들을  분노케 만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들들이 비리로 줄줄이 감옥을 갈 때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한어린 소감을 말했다.  노경규,  그는 70년대~80년도 초 까지 부산에서 활동을 했고  80년도 중반부터 서울에서 활동을 했으며  긴급조치 9호 투옥(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으로 부산, 대구교도소에서 수형생활을 했고  계엄포고령 투옥(전두환정권시)으로  부산, 마산교도소에서 생활했으며  집시법 투옥(노태우정권시) 으로 서울구치소에서도 옥고를 치렀다.

 

노경규의 주요경력

김대중 대통령 (민주화운동시) 비서,

신민당 중앙당 총무국장

평민당. 민주당. 국민당 지구당위원장,

박정희 유신정권시절 부산, 경남 재야단체인,  전) 민주회복국민회의 , 국민연합 부산경남 조직책

국제사면위원회 부산경남지부 전무이사

민주헌정동지회 부산지부 조직책

민주화추진협의회 부회장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위원

민주화운동비교연구소 운영 (현)

 

 

사진 좌측의 한복이 노경규 모습

 

사진 우측 저항하는 사람이 노경규

 

맨 위 手配者名單(1) 아랫줄 좌측 두번째가 수배자 노경규

 

과거 자신의 활동을 털어놓는 노경규 前 김대중 대통령 비서

일간투데이 류재복 대기자  yjb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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