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민주화운동 후 수차례 옥고...노벨 평화상은 조국에 안긴 '덤'

▲ 류샤오보. (사진=연합뉴스tv 화면캡쳐)

【서울= 서울뉴스통신】 강재규 기자 = "지옥에 들어가려는 사람이라면 어둠을 불평해서도 안되며, 반체제 인사의 길을 걸으려 한다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해서도 안됩니다."

"언론의 자유와 정부를 비판할 권리는 보장돼야 합니다."

13일 '영원한 중국의 만델라' 류샤오보(劉曉波)는 아름다운 어록을 남긴 채 상을 떠났다. 30연 억압과 감시 속에 살다간 류샤오보.

그가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풀려난 지 50여일 만에 그는 마침내 숨을 거뒀다. 하지만,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류샤오보의 사망 소식에 수많은 세상사람들은 그를 애도하고 있다.

라드 알 후세인 유엔 인권 최고대표는 "중국은 물론 세계의 인권운동에 헌신해왔던 투사를 잃었다"며 애도했다.

하지만 그의 모국(母國) 중국은 별다른 말이 없다. 중국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의 사망과 관련해 국제사회의 비난이 잇따르자 중국 정부가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촉구한게 전부다. 중국 <신화>통신에도 사진 한 컷 안보인다.

이날 밤 10시 10분께 <긴급> '류샤오보, 간암 사망' 첫 보도이후 류샤오보와 관련한 내정간섭 하지 말것을 촉구하는 내용과 의사 소견 정도가 있을 뿐이다.

<신화>통신 보도 등에 따르면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4일(현지시간) “일부 외국 정부 관계자들이 류사오보가 간암 투병 끝에 사망한 데에 대해 부적절한 언급을 하고 있다”라며 “우리는 관련 국가들에 중국의 사법 주권을 존중해달라고 촉구한다”고 밝혔다.

류샤오보는 공산당 일당독재 철폐를 요구하는 '08 헌장' 서명을 주도했다가 국가전복 선동 혐의로 2009년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지난 2010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그는 지난 5월 간암 4기 진단을 받고 가석방 상태에서 선양 소재 중국의대 부속 제1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그의 일생이 송두리째 바꿔져버린 것은 지난 1989년 발생한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운동.

1989년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 버나드 칼리지(Barnard College)에 방문 연구원으로 유학 중이던 류샤오보는 톈안먼에서 소요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각 귀국,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류샤오보는 톈안먼 광장 사수를 주장한 강경파들에 맞서 왕단(王丹), 우얼카이시(吾爾開希) 등과 함께 시위대의 광장 철수를 주장했고 무력 진압이 시작된 6월 4일 새벽에는 계엄군과 타협하여 학생들의 철수를 돕기도 했다.

‘톈안먼 4군자’로 불리게 된 저우둬(周舵), 허우더젠(侯德健), 가오신(高新)과 함께 벌인 ‘6.2단식투쟁’ 선언문에서는 “우리에게는 적이 없다! 증오와 폭력으로는 우리의 지혜와 중국의 민주화 과정을 막을 수 없다”며 공산당 정부와 학생 모두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사흘 뒤인 6월 5일 체포돼 ‘반혁명 선전선동죄’로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곧바로 당국에 의해 사면을 받은 것은 그의 비폭력적 성향이 고려된 것이란 분석이다.

톈안먼 후에도 중국을 지키며 투옥되기를 수 차례. 대부분의 톈안먼 지도부가 해외 망명을 통해 중국을 떠나는 순간에도 류샤오보는 중국을 지키며 4차례나 체포, 구금되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앞서 톈안먼 민주화운동 직후 체포돼 유죄 선고를 받은 뒤 사면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1월 ‘반혁명 선전선동죄’를 선고받았다가 형사처벌 면제 처분을 받았고, 1995년 5월 18일에는 6.4 톈안먼 운동 6주년을 기념해 톈안먼 운동 재평가를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벌이다 9개월간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중국의 대만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10.10선언’을 발표해 ‘사회질서 교란죄’로 체포되어 노동교양 3년 처분을 받았다.

그는 지난 2008년 12월 ‘08헌장’의 발표를 준비하던 중 공안당국에 발각돼 징역 11년 형이 확정되면서 그가 임종시까지 지냈던 랴오닝(遼寧) 성 진저우(錦州) 교도소에 수감됐다.

지난 2010년 12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던 류샤오보는 할리우드 스타인 댄젤 워싱턴과 앤 헤서웨이가 참여할 정도로 화려하게 진행됐지만 정작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수여이유는 “중국의 근본적 인권을 위한 그의 오랜 비폭력 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

하지만 정작 그가 자리를 지킨 것은 중국 랴오닝(遼寧)성의 한 교도소 감방일 뿐이었다.

하지만 류샤오보(劉曉波·61)의 이름은 점점 더 전 세계인들의 가슴에 각인되고 있었다.

그는 1955년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서 태어났다. 지린 대학 중문과 재학 시절부터 문학 서클에서 활동했던 문학 청년은 이후 베이징 사범대 중문과 대학원에 입학해 문학석사학위를 받은 후 같은 대학에서 강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문학비평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89년 그가 받은 박사학위 청구논문의 주제가 ‘미학과 인간의 자유’.

순수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던 문학도만큼이나 끊임없는 인간의 자유를 갈망했으나 이후 투옥과 감금의 시간을 거치면서 그의 비폭력 투쟁성은 타올랐다.

체코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의 ‘77헌장’을 본따 만든 ‘08헌장’에서 류샤오보는 중국의 일당 독재체제가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톈안먼 민주화운동’ 등의 사건에서 인권을 탄압하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을 비판하며 체제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재판을 받을 당시 그는 ‘나에게는 적이 없다’는 글에서 “증오는 지혜와 양심이 아니다, 적대적인 감정은 국가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야만적인 삶을 악화시키고, 사회의 관용과 인간성을 파괴한다. 또, 국가가 자유와 민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고 역설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를 석방하라고 세계의 눈들이 중국을 압박했지만, 서방의 압박이 강해질 수록 중국 정부의 입장 역시 더욱 단호해 졌다.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식 참석을 불허하는 한편 그의 부인 류샤(劉霞)마저 일시적 가택연금에 처하기도 했다. 노벨상을 수여하는 노르웨이와는 7년간 교류를 끊기도 했다.

또 외교적 루트를 통해 노르웨이에 초대된 64개국 대표 중 17개국의 참석을 사전 봉쇄했다.

중국 내부 단속도 철저했다. 중국 정부는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과 류샤오보에 대한 보도를 철저히 금지하고 바이두, 시나닷컴 등 중국 포털사이트에서 류샤오보 수상 관련 기사와 블로그를 차단하면서 중국인들의 뇌리 속에서 류샤오보를 격리시켰다.

시상식은 수상자 없이 진행됐지만, 류샤오보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감금해 놓은 조국에 첫 번째 노벨상의 영광을 안겨준 '영웅'이 됐다.

류샤오보는 지난 5월 말 감옥에서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으며, 중국 당국은 6월에야 그를 가석방해 선양 소재 중국의대 제1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했다.

평생을 억압과 탄압 속에 살다갔지만,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류샤오보.

그를 아끼는 모든 이들은 우리시대의 넬슨 만델라라고 헌사를 아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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