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그리는 '괴짜' 시인" 김석현, 그의 시 세계를 탐하다

시인화가 김석현, 그는 오늘도 사유의 광야를 달린다

발 디딜 틈 없는 작업공간... 도대체 시상은 어디서 오는 걸까

【서울=서울뉴스통신】 강재규 기자 = '그림 그리는 시인'으로 유명한 김석현(69. 문학박사) 시인은 상상과 진실을 꿈꾸는 시인이다.

그의 나이 종심(從心, 칠순)에 이르렀지만, 언제나 소년처럼 맑고 깨끗한 이미지 그대로다.  손도 매우 곱다. 흘낏 곁눈으로 쳐다본 바로는, 절대로 그 나이로 볼 수가 없는 피부빛깔이다. 흡사, 맑은 영혼이 육체로 투사되기라도 한 듯 하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 지하철 둔촌역에서 1킬로 남짓 떨어진 자그마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김석현 시인.

30여평 되는 그의 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 도무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 지 모를 정도로 미술작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미 작은 방 세 개는 미술 작품들로 꽉 메워져 있었고, 겨우 안방만 좀 헐렁해보일 정도였다.

아파트 거실엔 최근 붓을 들어 작업중이던 이젤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막 작품을 완성시키기 일보직전같아 보였다. 좀 어수선해보이긴 했지만, 작업공간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화실이 곧 삶의 공간이요, 삶이 곧 시와 그림이었다.

올 여름처럼 그 무덥던 시간을 그는 어떻게 보냈을까. 차라리 시상에 젖어, 혹은 붓을 잡은 손으로 땀 방울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려가며 화폭을 메워갔을 것을 생각하니 피서가 따로 없을 듯도 해 보였다.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면 그 보다 더 좋은 피서는 없을 게 아닌가 싶어서다.

평생 작시(作詩)한 것만도 수 천편에 이를 텐데, 요즘은 그림에 더 매료되었는지 최근엔 서울 경복궁 쪽에서 개인 시화전 '시인이 그린 그림'전(展)도 열었다.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 등 나라가 온통 어수선할 무렵 치고는 대 성황을 이뤘다고 자평한다.

'봄날에 대한 사유' 표지

"본래는 시를 썼었지요. 시는 저에게 숙명과도 같았어요..."

그가 말하는 시의 정의가 궁금했다.

"수많은 언어가 무의식 속에 침전돼 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포맷돼 의미를 부여받고 의식 밖으로 나오는 것이 시란 생각입니다. 시작(詩作) 동기에 의해 혼란스럽던 언어들이 잘 정리되고, 언어의 조직 망이 조응하게 되면 그게 바로 시가 되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시에는 언어를 밝고 맑게 정화시키는 기능이 있습니다."

원시 시대로 갈 수록, 본능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해 사람은 움직이는 법이다. 뭔가 손에 쥐고 얻었을 때 기쁨의 소리를 표출하는 법이다. 그같은 원초적 소리들이 정리되어서 안온히 되어 나올 때 주술적으로 주문되어 나오는 것이 바로 시가 된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시의 정의를 설명하는 그는 이제껏 쓴 시가 대략 5천여 수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의 초등학교 교사시절이던 1970년대 초 무렵, 얼만 아팠던 지 생과 사를 넘나들 정도였던 때다.

당시만 해도 법조인이 되겠다던 꿈마저 포기하고 나니, 권력에 대한 욕심이 사라졌고, 단국대 국문과 야간대 3학년 편입한 뒤 김용호 시인을 사사해 본격적으로 시 쓰는 법을 배웠다.

"23세의 나이에 초등학교 교사로 교단에 첫발을 디딘 후, 중고등학교 국어과 교사로 시인의 길을 걸어가면서, 모든 사회적 권력과 권위와 재물에 대한 꿈을 접었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정음시초 제1집' 표지

그리고 문학에 적극적으로 접근해가면서 그는 평생 시를 썼다.

그 누구와의 경쟁도, 이권 다툼도 아닌, 오직 자신과 싸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어떻게 글자에 담아낼 것인가에 온 정신을 쏟았다.

처음 그의 시 세계는 지극히 여성스럽기까지 했던 것같다. 단아하고 메타포 중심으로 흘러갔던 것. 그의 초창기 작품인 '봄날에 대한 사유'가 그렇다. 그러다 차츰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타면서 산문성이 농후해져갔다. 우리 사회의 문화현상을 반영해간 듯하다. 그만큼 생각의 폭도 넓어져갔고 내용도 확장돼갔다는 의미다.

"시는 셀프 콘페션이에요. 자기 고백입니다."

그래서 과거 경험을 끌어당길 수 밖에 없는데, 그 모티브에 의해 과거로 돌아가게 되는 법이란다. 내가 존재하는 포지션에서 과거-현재-미래를 넘나들게 되는 것이 시인이라는 설명이다. 그 틀에서 자유로와야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 어느 틀에 구속되면 사고와 사상도 갇혀 시를 쓸 수 없게 된단 것이다.

그의 시작(詩作)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한다면, 누구도 시도 안했던 '단어 연작시'에 있다. 한글학자 일석 이희승 박사의 국어 대사전을 펼쳐놓고 단어를 표제어로 해서 써간 시가 무려 2000수에 이른다. 그가 시문단에서 '괴짜'로 불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한 때, 남들 다 하는 '신춘문예'에 도전을 안해본 것은 아니다. 그러다 문득 꼭 신춘문예에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시만 쓰면 되지, 제도의 틀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 접었단다.

그러다가 인생을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찾아왔다. 자신의 나이 40대 초반 무렵, 아끼던 동생 둘이 연거푸 세상을 떴다. 하나는 간암 투병끝에, 다른 하나는 리비아 사막서 트럭을 운전하던 중 사고를 당했다. 불과 1년여 사이에 이런 일을 당하고 나서, 자신의 고교 교사 재직 시절, 그 학교 교장선생님에게 아내가 "당신의 육필 시집을 드려보자"고 제안해 그걸 수락한 것이 본격적인 시인으로 변신하게 된 배경이다.

한참 성장기였던 18세 무렵, 어머니를 여의였고, 정신적 지주같던 아버지를 자신의 40대 초반, 그 무렵에 또한 여의게 된 것도 그가 시 쓰는 일에 몰입하고자 했던 이유다.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언가에 몰입해야 했던 절박한 이유였던 것.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시를 마치 시인의 전유물처럼 여기는 법은 없다. 운율에 얽매인 시 보다는 방랑시인 김삿갓처럼 자유로운 시품을 좋아한다.

해서, 그의 첫 자비 시집 '봄날에 대한 사유'는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약 30년 전이다.

그의 <정음시초> 1집 '서문'에서 그가 얼마나 가르치고 배우며, 형설지공을 이루어 내보려고 몸부림쳤던 가를 엿볼 수 있다.

서   문

우리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의 모든 일과 사물들은
그 자리 그대로, 거기서
그들만의 소리로 의미를 실어 전하거늘,

우리는 말하고 글자를 쓰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 뜻을 다 알아내지 못하여 애가타서,
오늘도 어떤 대상을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소매를 걷는다.

나에게로 오라고 와보라고,
소리를 치면서

굳이 시를 쓸 때 큰 '영감'을 받아서 쓰는 건 아니다. 이 부분이 다소 궁금해 물었을 때도 그는 같은 대답이었다.

살아가는 과정 중에 감성과 이성 속에 순간순간 모티브를 잡느냐 못잡느냐 하는 차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시가 생활 속에서 멀어지고, 외면당하다보니 그 결과로 인해 시가 주는 기능을 못받고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인생 늙수그래 할 무렵, 국민 시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남들이 알아주든 안알아주든 그건 상관없다. 그게 종심(從心)의 나이에 접어든 그의 제2의 인생 방향이다. 그 꿈을 이제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자신과 접하는 사람들에겐 이멜을 먼저 요청해 시쓰기 기본서에 해당하는 자신만의 파일과 수많은 시작(詩作)노트를 보내준다. 혼탁스런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재능기부'처럼 말이다.

그가 곧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다.

"트루스(Thruth)는 나를 존재케 하는 것이에요."

현실의 자그마한 꿈을 이루려니 약간의 돈은 필수일지 몰라도 트루스를 떠난 시인, 트루스를 떠난 화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지금 그는 시의 높은 경지를 넘어 그림에 더 심취해 보인다. 힘 있는 한국 소나무를 즐겨 그린다. 그림을 그리면서 삶에 힘과 용기를 얻는 식이다.

한 때 미국 캔자스시티 한 대학 문예창작과 석박사 과정을 진행하던 중 발견된 뇌종양으로 급기야 뇌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는 바람에 학위도전을 접어야 했지만, 붓을 잡고 그림을 배우면서 건강을 회복했으니 인생 2막은 그림과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자신을 돌아다봐도 참 신기할 뿐이다.

지난 7월무렵엔 자신이 그린 그림 여러 점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모겐스 리케토프 전 유엔의장, 안토니오 구테레스 현 유엔 사무총장 등 국제인사들까지 관심있게 댓글을 달아줘 큰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당장 유엔으로 한 번 방문해달라. 상설 전시관이라도 만들어드리겠다"는 극찬의 글도 보내온다고 자랑한다. 페이스북으로 전세계 명사들과 당당히 영어로 소통하는 그의 일상을 잠시 들여다보면,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그림들 40~50점을 다시 모아 조만간 또 한 차례 개인전을 가질 계획이란다.

오늘도 '상상을 꿈꾸는 시인' 김석현 화가의 맑은 영혼은 손에 든 붓과 함께 사유의 바다를 건너고 있는지도 모른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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