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꾸는 운동에 전력 다할 것”

【수원=서울뉴스통신】 대담: 김인종 경기남부취재본부장 / 글.사진:류재복 대기자 =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 있다. 천도교 대표 15인, 개신교 대표 16인, 그리고 불교 대표 2명, 이들을 흔히 민족대표 33인이라 부르고 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 제작 및 배포, 그리고 3·1운동의 구체적인 계획 수립을 세웠다. 이들은 원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직접 만세운동을 주도하려했지만 이들은 태화관 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후 이들은 쭉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대부분 옥사하거나 병에 걸려 순국했고 살아남았던 분들은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기미년 3월 1일에 거행된 독립만세운동은 빼앗긴 조선을 이은 대한민국 건립의 단초다. 때문에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은 우리 역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지도자다”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 김재옥 회장의 말이다.
지난달 30일 오전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그를 만나 봤다. 이날 기자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김 이사장은 서예를 하다가 기자를 맞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가 모여 독립선언식을 하는 모습의 그림이 있었고 그 옆에는 손병희 선생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받은 건국훈장이 걸려 있었다.

-이사장이 된 동기는 무엇인가?
▶서예를 좋아한다. 20년간 서예를 하다 보니 역사에 대한 답사를 좋아하고 또 관련 책을 읽었는데 특히 근대사와 구한말에 관련된 서적을 읽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대해 파고들게 됐고 특히 천도교가 독립운동에 많은 가담을 했고 그 정점에는 손병희 선생이 있는데 독립운동 단체 사람들이 나를 보면 “어쩌면 저렇게 손병희 선생님을 닮았을까?”라면서 시선을 보였다. 그때가 2011년인데 이때부터 나는 손병희 선생님의 후손이라 다짐하고 (사)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 이사로 들어가 활동을 하다가 그 후 부회장, 회장을 거쳐 이사장이 됐다.
내 나이 18세 때인 1971년 나는 고아로 자랐기에 부모님이 누구인지, 나의 뿌리는 어디인지 찾아 나섰다가 근·현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사실은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결국 오랜 시간 나는 머릿속에서만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를 화두로 삼고 살다가 내 자식들이 성장해 독립할 나이가 되자 나는 ‘오랜 꿈’을 실천하기 위해 민족대표 선양사업 시작 후 독립 운동가들의 치열했던 삶의 애환을 이해하고자 우선 천도교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동학혁명과 천도교 독립운동 역사를 알 수 있었고 또 해공 신익희, 단재 신채호 선생 등의 삶을 접하면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치열했던 삶의 애환도 알게 되면서 결국은 2010년에 이곳 단체에 발을 들여놓았다.

-일제강점기의 한국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독립기념관에 비치돼 있는 근대·현대사 책을 현재 2년째 읽어보고 있지만 일제가 우리를 침탈하고 점령을 한데 대해는 당시의 고종황제를 비롯 모든 관료들이 모두가 밧데리가 나간 상태였다. 이 문제로 가끔 교수들과도 토론을 하고 있지만 당시 고종이 일본과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민비의 오빠인 민영환에게 처리를 맡겼는데 민영환은 다시 이 일을 이완용에게 시킨 것이다. 결국 이완용은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었고 그래서 매국노라는 오명이 그에게 붙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배우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조국을 위해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독립운동을 하신 선조들을 위해 몸을 바쳐보자는 뜻으로 (사)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에 뛰어들게 됐다.

-현재의 한국 상황을 보면서 시정할 것이 있다면?
▶구한말 사태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고 있지만 내년은 3·1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의미 있게 우리 단체를 꾸려나갈 생각이다. 내 개인적 생각에는 국회의원 300명도 많다. 100명 정도가 좋고 지자체단체장, 즉 시장도 당적을 버려야 한다고 본다. 또한 이제는 3·1운동이라 하지 말고 3·1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 나는 현재의 독립운동단체 이사장 업무를 손병희 선생의 후손으로서 당연히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기에 동참을 하는 것이고 다시는 우리나라가 외세나 내란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즉 외세는 국력이 약해져 외국의 침탈을 막지 못하는 것이고 내란은 내부적으로 이간질을 해 혼란을 야기 시키며 국기를 흔드는 것이다.

-향후 포부를 밝힌다면?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꿔야 하기에 이 운동에 전력할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대한민국으로 바뀐 것은 혁명이었다. 이를 통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현재의 역사로 대한민국이 이어질 수 있었기에 ‘혁명’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국가의 정통성과 역사성이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3·1운동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소위 ‘33인기념관’ 사업은 함세웅 신부, 이희호 여사 등과 함께 참여하면서 ‘100년간 외세에 빼앗긴 역사의 땅, 용산’에 건립을 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경기도 이순테니스연맹에 대해 말 해 달라?
▶60세 이상의 테니스 동호인들이 만든 것으로 어르신들이 마음껏 운동할 수 있게 뒷받침하겠다는 뜻으로 테니스단체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처음 회장을 맡아달라고 제의를 받았을 땐 부담감이 커 선뜻 하겠다는 말을 못했는데 어른들의 간곡한 부탁을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어 제대로 심부름꾼 역할을 해볼 생각으로 회장을 수락했다.
이순테니스연맹이 가장 중점을 두는 사업은 해마다 개최하는 경기도 전국이순테니스대회다. 초창기에는 40~50명이 참가했지만 지금은 전국 각 지역에서 500여 명의 동호인이 출전해 기량을 겨루는 국내 대표 시니어대회로 자리 잡았다. 90세가 넘는 백발의 어르신들이 열정적으로 코트를 누비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대회는 흔치 않은데 앞으로도 계속 어르신들을 섬기면서 대회의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할 계획이며 당장은 어렵겠지만, 시니어 동호인들이 즐겁게 테니스 칠 수 있는 마당을 더 많이 제공하겠다.

손병희 선생의 후손임을 자처하면서 현재의 일을 하고 있는 김재옥 회장, 그는 “계속 노력을 해서 나의 조상을 꼭 찾을 것”이라면서 “나는 가식, 그리고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해 줄을 서려고 하는 작태를 용납 못한다”는 그는 2015년 일본 나고야를 방문, 신사에 가서 만세를 50번 불렀다. 그의 좌우명은 ‘조국’이다. 그만큼 나라를 사랑하고 있다.
그는 집안이 무탈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2006년 4월에는 수원사랑장학재단을 발족해 이사로 있으면서(현재 290억의 기금이 있음) 그 이자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한때는 태권도체육관을 운영하기도 했던 김재옥 이사장, 그는 수원시민들에게 “수원은 문화와 효(孝)의 도시로 내 고향과 같고 또 뿌리라는 생각으로 수원에서 살고 있음에 항상 감사를 드린다”면서 “나는 아내 박계숙(61)과 결혼을 해 1남1녀를 두었지만 며느리에게는 다산을 권유했다. 이에 며느리도 시아버지인 나의 권유를 받아들여 3명을 낳았고 네 번째 임신 중에 있다”며 며느리 자랑을 했다.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대한민국 명인미술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것을 비롯, 각종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사람이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갈 수 있나? 수의에는 주머니도 없다. 그러기에 죽은 뒤 만인에게 지탄받을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욕심이나 욕망 때문에 나와 주변, 국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를 하는 김 이사장은 분명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선각자적 기질이 있었다. 내년은 3·1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현재 수원시에서도 이 기념행사를 위해 추진위원회가 구성이 되는데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는 김재옥 이사장에 대해 추진위 고문을 맡게 되는 김훈동 회장은 김재옥 이사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재옥 이사장은 젊은 시절, 유공회사(현재의 SK)에 취업을 했다.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수원유류저장소를 운영을 했는데 당시 한국전체에서 가장 많은 유류를 저장해 팔면서 정당하게 부를 축적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수원사랑장학재단에도 1억을 기부하는 등 지역사회를 위해 현재까지 수억을 출연하면서 좋은 일을 했다. 그는 또 12월에 수원에서 공연되는 ‘신흥무관학교 뮤지컬공연’(독립운동을 다룬 공연)에 김 회장은 이 공연의 입장권을 구입, 소외계층의 시민들이 많이 보게 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특히 김 이사장은 내년 3·1운동 건국 100주년을 맞아 김 이사장이 소유하고 있는 광교지역에 건물을 지어 독립운동관련 단체들을 한곳에 모이게 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훈동 회장은 또 “숨은 이야기가 있는데 김 이사장은 고색동에 땅이 있다. 그런데 그 대지를 임대받아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이곳에 어느 업체가 보증금 300억에 월 1억8천의 월세를 주고 임대를 하려했지만 김 이사장은 그 업체가 일본계 업체라는 것을 알고 거절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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