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의거 110주년의 해 …19일 상오 11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 (사진 제공 = 전명운의사 기념사업회·담양전씨 대종회)

【서울=서울뉴스통신】 이상숙 기자 = 12일 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회장 전무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던 죽암 전명운(1884∼1947년)의사의 서거 71주기를 맞아 위훈을 기리는 추모식이 19일 월요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서 거행된다.

1884년 서울에서 태어난 전명운의사는 1903년 유학을 목적으로 하와이행 노동이민 대열에 끼어 도미했다. 돈이 없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다가 1904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부두, 철로 공사장에서 일했다. 이 후 안창호 선생이 중심이 된 공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전명운의사는 1908년 3월 23일 장인환 의사와 함께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 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대한제국 외교고문이자 친일미국인이었던 D.W. 스티븐스를 페리 빌딩 앞에서 저격했고 치명상을 입은 스티븐스는 이틀 뒤 사망했다. 이것이 110년 전 샌프란시스코의거다.

(사진 제공 = 전명운의사 기념사업회·담양전씨 대종회)

독립운동사에서 개인이나 소규모 조직으로 암살과 파괴를 주로 하는 활동을 '의열(義烈)투쟁'이라고 부르는데, 스티븐스 처단을 최초의 거사로 꼽는다.

전명운·장인환 의사가 지핀 의열투쟁의 불길은 이후 안중근, 이재명, 강우규, 김지섭, 나석주, 조명하, 이봉창, 윤봉길 등으로 이어졌다.

전명운의사는 법정에서 "대한제국의 국록을 먹는 스티븐스가 일본을 돕고 우리나라를 배반해 애국심으로 총살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에 체포된 전의사는 재미동포사회의 끈질긴 구명운동 끝에 무죄를 선고받아 97일 만에 석방됐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기지 건설에 참여하면서 안중근 의사를 만나 하얼빈 의거를 성공시키는데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1909년 11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나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1947년 11월 1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사진 제공 = 전명운의사 기념사업회·담양전씨 대종회)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으며, 유해는 조국을 떠난 지 90년 만인 1994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됐다. 더 자세한 내용은 죽암전명운의사 기념사업회(02 2297 2951)로 문의하면 된다.

(사진 제공 = 전명운의사 기념사업회·담양전씨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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