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철저한 자기성찰과 투쟁을 통해 정점에 오르는 것”

▲ 정명희 수원문인협회 회장이 인터뷰에 앞서 밝은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수원=서울뉴스통신】 대담=김인종 편집위원장/ 글=김동초 대기자 =

40년 교직생활…교장직 끝으로 정년퇴임
아이들 가르치며 틈틈이 창작… 힘든 시간 이겨내
작가와 교육자로 활동하며 수많은 상 수상
소통·공감하며 주위를 아우르는 삶 살고파

‘문학’을 다루는 사람들을 ‘문인’이라고 한다. 문학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 등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보다는 대상이나 소재를 주로 상상의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다른 예술과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면 문학은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표현되는 예술이다.

문학의 소재는 언어이며 그 언어를 조합해 조직화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고 보면 무난할 것 같다. 문학에서 말하는 ‘문(文)’은 ‘말(言)’이 아닌 글을 뜻하며 ‘문인(文人)’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문예(文藝)’에 종사하는 사람. 즉 시인이나 소설가, 평론가 등을 이른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아름답고 오묘한 언어의 유희를 사랑하는 문인들이 수도권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도시인 수원에 많이 존재하는 편이다. 수원에는 문학을 사랑하며 문학에 빠진 문인들이 매우 많다.

‘수원문인협회’가 수원문인들의 대표적인 단체이며 회원 수만 무려 1200명 가까이 된다. 해서 새수원신문은 1200명이란 많은 문인들의 리더인 ‘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의 문학세계와 삶의 질곡을 수원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 인터뷰를 진행했다.

수원의 팔달구 화서문로 35에 위치한 행궁동 접경에 수원문인협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1월 오후, 정초의 햇살아래 ‘수원 문학인의 집’이라는 하얀 글자조각이 반원의 목재 바탕에 소담스럽게 앉아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햇살이 지나가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닥터 지바고(유리 지바고역, 오마샤리프)’와 막 대화를 나누다 마중을 나오는 ‘라라(줄리 크리스티)’를 연상케 하는 여인이 있었다.

머리에 쓴 하얀 털모자처럼 눈가루 같은 미소로 취재진을 맞이해 주었다. 1965년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데이비드 린’ 감독이 메거폰을 잡은 불후의 ‘명작’이라 기억에 남는 영화이며 필자의 뇌리에 주인공들이 각인이 되어있었던 그 장면과 너무 흡사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의 분위기가 묘하게 교육자를 상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곱게 ‘실버그레이’를 맞이하는 ‘여인(女人)’인 정명희 수원문인협회회장은 아니나 다를까 초등학교에서만 40년 이상을 교단에 있었다고 한다.

2017년 여름을 마지막으로 정자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퇴임 40여 년이 넘는 시간을 교단에 몸 바친 모습이 자연스럽게 풍겨져 왔다. 평생을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을 모습이 무척 다정스러웠다.

그의 문학적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슬며시 떠 올라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정명희 수원문인협회회장은 우리나라의 마지막 ‘청정(淸淨)‘ 보고인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충북 괴산군 연풍면 면장을 지내셨고 일찍이 교편을 잡고 계시던 아버님과 어머님의 남다른 문학적 정서가 탄탄한 집안의 4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넓직한 안방을 서재 겸 숙소로 쓰시던 아버지의 방에는 엄청난 양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입학 전에 수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시절로 보면 특별한 상황이었으리라. 6세 시절 당시에 읽었던 책들로는 상상의 세계를 대표하는 ‘소공녀, 소공자’ 등 주로 세계 어린이 문학 전집을 많이 읽었다고 했다.

또한 부모님이 모두 교직에 계셨으며 아버님은 전통 수묵화를 소재로 한 시·서·화에 능했던 까닭에 자연스럽게 총체적인 문학적 분위기가 잘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 결과 정명희 수원문인협회회장의 교직 40년은 어쩌면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 같다. 후일 부군도 청주교대 같은 72학번 동기생으로 같은 학교에서 만나 결혼에 골인을 했다고 했다. 신기 할 정도로 선대부터 부부 모두 집안이 교직자들의 집안이었다.

정명희 회장은 이렇게 교육적 환경에 접해 있었던 까닭에 문학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성장했고 많은 시집과 수필집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겠다.

인터뷰 도중 정명희 회장은 집안내력에 대해 ‘송강 정철’의 후손이며 정약용의 자손임을 자랑스러워 했다. 강직하고 절개 넘치는 위상과 문학의 최고봉을 달렸던 그 분들의 유전적 함유는 문학의 길을 간 계기 중 하나였음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했다.

정명희 회장은 6세가 되던 해 남들보다 2년 일찍 청주의 ‘석교초등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급우들보다 두 살이 어린 정명희 회장은 덩치도 작고 아기 같이 어려서 동생취급을 당하기 일수였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숨바꼭질 하자”를 쓰라고 했는데 키가 작은 탓에 잘 못쓰고 막 울었더니 선생님이 업어서 달래주시기도 했다며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에선 60년 전 아주 조그만 어린 소녀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그 당시 기억에 남는 것은 공책에 바둑판처럼 네모로 그려진 ‘깍두기공책’이 기억에 선하다고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좋아졌네, 좋아졌어”라는 ‘새마을 운동가’나 ‘멋진 사나이’라는 군가 등을 작사한 이진호 선생님이 ‘글짓기 반’에 들어가게 해주셔서 어린 시절부터 문학의 꿈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시제‘를 주면 집에서 연습을 해와 수업시간에 빨리 적응을 했지만 준비된 과제보다는 창작적인 면을 중시하시던 선생님이 좀 더 자유로운 발상을 요구하시던 기억이 아련하다고 했다.

이진호 선생님은 정명희 회장의 작품을 학교(석교초)신문에 실어주시며 창작열을 북돋아 주셨던 것이 오늘 날 정명희 회장이 문인의 길을 걷는 계기였다고 했다. 집에서의 정명희 회장은 어릴적 아버지의 서재에서 ‘문학사상’ ‘현대문학’ 등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닥치는대로 꺼내서 읽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저절로 글자 공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입문한 특별한 계기가 훗날 자연스럽게 문학과 친숙해 진 결과였다며 문인이 체질인것 같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어릴 때도 글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완성도가 높은 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서 어떻게 글로 탄생되었는지 끊임없이 의문을 품었는데 그 해답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쓴 글이 마음에 들 때까지 완성도를 높이려 애쓰던 순간들도 많았으며 ‘삶의 희망’이라는 소중한 테두리 안에서 문학의 길을 걷기위해 많은 도전을 했다고 술회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남의 ‘글’에 대한 평가를 하기 보다는 함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침없이 토론하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읽으며 인간들이 겪는 ‘지적 방황’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 같다고도 했다. 또한 ‘죄와 벌’ ‘데미안’ 등 주로 세계문학전집들을 많이 읽으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기도 했다. 고등학교시절엔 김동인의 ‘감자’나 박경리의 ‘토지’등 ‘한국문학전집’을 주로 읽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처절한 삶에 대해 고뇌하기도 했다.

그 당시 청주여고에서 실시한 ‘백합 시화전’에 시와 그림을 출품했었는데 너무 잘 썼다는 관계로 시의 한 구절을 두고 관람하러 온 남학생들이 유명시인의 구절과 많이 비슷하다며 모작을 의심해 속상해 하던 적도 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청주교대’ 재학 시절에는 ‘학보사 기자’로서 업무부장까지 맡아 신문제작을 했으며 그 때가 가장 순수한 시를 썼었던게 아닌가 하기도 했다. 선배 기자 중 ‘동화작가’가 된 선배가 정명희 회장의 문장력을 높이 평가해주며 칭찬을 해주어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직접적으로 가지게 했다.

그렇게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꾸고 있을 때 유영선이란 선배 언니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귤빛 색깔의 부나비’란 작품으로 등단한 것을 보고 무척 부러웠었다고 했다. 그 선배는 청주에서 작가로서 신문기자로서 현재 평판이 높다고 했다.

그 선배의 성공한 모습을 보고 자신감이 생겨 도전을 계속했고 당시 쓴 ‘間(간)’이란 시와 단편소설이 교지에 실리면서 동창생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다. 본 기자도 인간의 ‘삶과 삶’ 사이의 여백은 잘 들여다볼 수 없으며 간과할 수 있는 주제이긴 했으나 그 사이를 들여다 보고 시를 썼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작품은 지금 생각해도 꽤 괜찮았다고 생각된다며 미소를 띠며 흡족해 하기도 했다.

문단 활동을 하며 넓은 집이란 ‘예당’과 ‘꽃노을’이 합쳐진 ‘예당꽃노을’이라는 예명을 갖게 되었는데 지금도 쓰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예명이 너무 길어 예당 선생이라고도 하고 꽃노을님이라고도 하며 부르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의 결혼은 같은 청주교대를 졸업했고 교사로서도 같은 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았던 부군과 백년가약을 맺었다고 했다. 당시 부군을 복도에서 만나 팔만 스치기만 해도 전율이 흐르고 얼굴만 봐도 설레일 정도로 좋아했었단다.

지금도 그 여운이 지속되고 있으며 무엇을 하던 늘 그의 내면을 인정하고 존경한다니 실로 놀라웠다. 부군과 결혼한 이유 중 하나로 본인의 고향에서 상록수처럼 목이 쉬어가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헤어지기 싫어하는 제자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열정적인 교사의 모습에 넋을 잃어 결혼을 승낙했다고 상기했다. 지금도 부군을 바라보면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고 한다. “소설 같은 이야기다.”

정명희 회장은 학생들을 교육하던 당시는 틈틈이 창작활동도 했었지만 어느 순간 학교일에 전력으로 ‘올인’을 하다 보니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기 힘들었던 것이 제일 속상한 부분이라고 회고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매료됐고 대학 시절에는 수필의 아름다움에 빠져 한동안 가슴앓이를 할 정도였으며 후일 교사로서 열정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쳤던 시기까지 거의 모든 삶을 문학과 함께 그리고 문인들과 함께 한 ‘생‘이라고 자신의 삶을 정의했다.

정명희 회장은 2004년에 등단을 했으며 2월에는 아동문예에 ‘사랑의 반딧불’(정명희 회장의 사랑에 대한 기본정서라고 주장)’이란 ‘동시’가 당선되었으며 7월에는 문예사조에 ‘비내리는 바다’라는 시가 당선되었다고 했다.

이어 11월에는 지구문학에 ‘매향리이야기(2000~2004년8월까지 화성석천초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쓴 수필)’가 당선되며 왕성하게 창작활동에 몰두 했었다는 말도 덧 붙였다. 수원과의 인연은 1991년 수원 구운동에 입성하여 91년 당시 수원에 신설된 정천초등학교(정자동+천천동)와 팔달산 아래에 위치한 매산초등학교에서 근무를 했던 때부터였다,

수원에 살면서 화성구봉초등학교에서 (2004~2006) 교사, 그리고 제자리에서 교감을 거쳐 2012년 8월 정자초등학교 공모교장으로 부임해 2017년 8월 말에 모든 교직생활의 종지부를 찍는다. 약 2년 반 후 2019년 12월 제30대 한국문인협회 수원시지부 회장직에 취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간 정명희 회장은 수십여 편의 작품들을 집필했으며 대표적 작품들로 동시,‘사랑의 반딧불’(아동문예지2004년), ‘햇살비(동시집)’ ‘나비가 된 겨울’(2016년), 동시쓰기의 실제:동심으로의 행복한 글쓰기(2016), 시집 ‘사랑 한잎, 그리움 한잎(예사랑2007년)’ 시집 ‘사피니아연서’(예사랑2014년), 동화집 ‘동그라미 요정(아동문예2015년)’, ‘엄마가 사오신 무지개 꿈’ 등 다수의 저서와 공저로는 ‘詩(시) 문학이론의 실제’(지성의 샘2015년), ‘꽃들도 하늘을 날고 싶다’ 외 다수의 작품집을 남기고 있다.

수상으로는 아동문예문학상(2004), 아동문예본상, 문예사조 신인상(2004)과 지구문학 수필상(2004)을 비롯해 청소년 홍익장(훈장), 아동문예 본상(2014) 등 수많은 수상을 비롯해, 모범공무원 국무총리표창(2006), 경기문학인 대상(2011년), 자랑스러운 경기문학인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매월당문학상(김시습2008), 2017년에는 황조근정훈장(대통령) 등 교육자와 작가로서 수십 여개의 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

정명희 수원문인협회회장은 창작열이 최고조일 시기에는 하루에 10~15편의 습작시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가끔씩 몇 작품은 꺼집어내 ‘반추’를 하기도 하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살린다고 했다. 수원문인협회와의 인연은 2012년 10월 정자초 교장 재직시 수원문인협회에서 실시하던 ‘홍재백일장’ ‘시화전’ 등 많은 행사에 참가 회원으로 인연을 맺었고 2014년 (전)숙지중 안희두 수원문인협회장 당시 이미 수원문인협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끝으로 ‘좌우명’을 묻자 딱히 좌우명이라 표현하기에는 좀 어색하지만 부모님께서 내려 주신 ‘정화-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를 통해 “소통하고 공감하며 주위를 아우르는 인생을 살자”라는 인생철학을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문학은 개인적인 면이 강한 ‘장르’로서 자기 성찰을 위해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만이 정점에 오를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지만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각자 개성을 살리고 어울릴 줄 아는 삶의 자세 속에서 다양한 문학적 정서가 쌓이는 것이라고 연륜에 맞는 표현을 했다.

그것은 진정한 소통과 공감이 없이는 절대로 이루 질수 없다.

“소통하며 공감하고 타인을 인정하는 삶”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이렇게 2시간이 훌쩍 넘게 인터뷰를 하면서 필자도 한 때는 문학에 심취했던 기억들이 ‘포도송이’처럼 ‘몽글’거렸고 당시의 문학청년처럼 설레이기도 했다. 공감대란 좋은 것이다. 특히 같은 분야, 같은 취미의 공감대가 형성 될 때는 더욱 그렇다.

정명희 수원문인협회 회장과의 인터뷰는 경제위주의 팍팍한 현대사회에서 포근하게 기댈 수 있고 조금이나마 정서적으로 따뜻하게 안길 수 있는 현대인들의 쉼터였는지도 모른다.

문득 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의 포스와 열정에서 우리나라 대표적 소설가이며 서사시인인 ‘박경리’씨가 떠올랐다. 제 2의 ‘토지’같은 대작이 그녀의 인본주의적 감성에서 터져 나올 것 같은 예감으로 부푼 기대감이 함께 몰려왔다. 분명하게 내재된 그녀의 삶에 깊숙이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해거름 시각, 문학에 빠지며 ‘창작’이 목마른 적당하게 아름답고 적당하게 상쾌한 ‘지적고통’이 섞인 ‘초겨울 오후’의 아쉬운 인터뷰를 뒤로 하고 수원문학인의 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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