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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윤영근 미나리광시장 상인회장“정직한 거래로 곳곳에 입소문 … ‘태양초 고추’같은 남자”
  • 경기남부 취재본부 김인종 기자
  • 승인 2020.02.1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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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근 미나리광시장 상인회장이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잡았다.

【수원=서울뉴스통신】 대담 김인종 기자 / 글 김동초 대기자 =

고향친구와 수십년 우정으로 미나리광시장 인연
고추방앗간 초기 어려움 딛고 이젠 고추박사 대열에
질 좋은 고추 공급받아 소비자와 직거래 보람
시장위해 궂은일 마다안해… 2019년부터 회장 중책
좌우명? 시장상인들과 언제까지나 “다함께 잘살자”

수원 남문 권에는 시장이 많다. 수원천을 기준으로 9개의 시장이 거의 밀집되다시피 해 늘 그 일대가 북적거리는 느낌이다.

예부터 하천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되고 상거래가 발생하고 상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며 북적이기 시작한다. 시장명에서 풍기 듯 야채를 주로 취급하는 미나리광 시장은 이름 자체만으로도 정겹다. 그래서 그런지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미나리광 시장의 윤영근 상인회장의 이름과 모습도 정겹고 푸근하다.

윤영근 회장의 순박한 모습은 그의 고향이 순박해서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인터뷰 도중 들기도 했다. 윤영근 상인회장은 1959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초·중·고를 모두 보은에서 나왔다고 했다.

당시 보은은 전기가 없었다고 한다. 안 들어온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전기가 안 들오니 당연히 TV도 없었다고 했다. 필자와 비슷한 또래여서 인지 그 당시의 기억이 새롭다.

서울 서대문에서 말을 배우기 시작한 필자도 당시엔 TV가 있는 집이 동네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에 1950년대의 충북보은은 정말 산골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전기도 충분히 보급되지 않은 관계로 석유 등잔이라고 불리던 심지가 올라가 석유를 태우며 ‘표주막모양’의 등잔이었고 그을린 유리 커버를 닦는 일이 일과 중 하나였던 기억이 새롭다. 윤영근 상인회장은 약간은 조숙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중 3때부터 ‘술과 담배’를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딱히 윤 회장이 불량해서가 아니고 당시의 시골엔 학교를 2~3년에서 길게는 5년 늦게 다녔던 20살 가까운 나이 많은 동급생들이 많았던 관계로 술과 담배를 접하는 게 자연스럽기 까지 했다고 했다. 더구나 시골구석 마을은 별로 청소년들이 ‘즐길거리’가 마땅치 않았던 점도 그런 현상이 일반화 되는데 한 몫을 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그래서 지금도 앉은 자리에서 막걸리 4병 정도는 기본이라고 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윤영근 회장의 모습이 60대 초반을 넘겼는데도 단단해 보인다. 당시 10대 후반, 혈기가 왕성 할 때에는 친구 둘이서 막걸리를 한 말 정도를 마시기도 했다며 당시를 회상하는 윤 회장의 모습에서 볼떼기가 바알 갛게 달아오르던 소박한 시골스런 모습의 풋풋한 미소년들이 연상되기도 했다. 참으로 때 묻지 않은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소유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윤영근 상인회장은 ‘보은농고’로 진학을 했는데 당시 학업보다는 ‘레슬링’에 관심이 많아서 였다고 했다. 당시에 정식으로 레슬링을 배우려고 체육관에 가서 등록을 했는데 기술이나 트레이닝 없이 군기를 잡는다고 무작정 구타를 해 바로 그 자리에서 레슬링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고 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운영하는 ‘협업농장’이 2㎞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학교가기 싫은 날은 농장에가서 실습을 한다면 땡땡이를 치곤하던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당시 청소년들의 자그마한 일탈중 하나가 땡땡이였고 도시학교였지만 필자도 가끔 땡땡이를 치곤하던 기억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돌기도 했다.

해거름 저녁이 되면 친구들 집에 돌아가면서 모였고 그 자리에서 ‘뻥’이라는 화투놀이로 술내기를 하곤 했다고 한다. 당시 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한 쪽에서는 ‘뻥’을 치고 한 쪽에서는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도 하고 박수도 치며 친구나 선·후배들과 돈독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다고 했다. 주로 친구 집에서 자주 모였고 안주로는 두부나 김치찌개가 단골메뉴라고 했다.

가끔씩은 콩을 볶아서 먹기도 하며 질풍노도의 청소년기가 흘러갔다고 했다. 당시는 동네어른들이 다 부모와 자식 같기도 해 친구가 집에 없어도 그 집에 가서 일을 도우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당시 멤버였던 상민이란 친구와는 평생을 함께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지금은 수원에서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며 어릴 적부터 계속 연을 이어오며 형제나 가족처럼 애정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윤영근 회장이 수원으로 이전, 삶의 터전을 마련하게 된 동기도 그 친구로 인해서 이루어 질수 있었다고 했다. 수원에서 초창기 생활을 할 적에 그 친구가 경찰계통에 근무하던 관계로 야근을 하거나 잠복근무가 끝나면 가끔씩 박영근 회장의 집에 와서 함께 새벽 술을 마시곤 했다고 했다.

윤영근 회장은 군 제대 후 고향인 보은에서 집안 농사일을 돕다 장래를 생각해 도시에 일자리를 구할 적인 87년 경, 그 상민이란 친구가 수원에서 일자리를 마련하고 불러주어 수원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당시 ‘영신전자’라는 삼성전자에 납품하는 회사에서 89년 까지 2년간 근무를 하고 나름대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 친구가 소개해준 지인과 기계나 선반을 제작하는 업종으로 사업당시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향 보은에 있던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고 자신은 현장을 맡아 일을 했고 동업자는 자금관리 등 운영을 맡았는데 급여도 주지 못할 만큼 악화되었고 결국은 동업자가 자금횡령 등을 일삼았던 관계로 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며 나중에 사기를 당한 것을 알게 됐다고 토로했다.

친구가 적극 나서 투자금 2천만 원 중 1천만 원은 돌려받을 수 있었다며 위안을 하기도 했다. 사업 후유증으로 힘들어 하며 6개월 정도의 휴식기를 가졌고 친구가 경찰직을 내려놓고 변호사 사무실의 일을 하기 시작하며 그 친구가 취직한 변호사가 지은 건물에 빌딩관리인으로 취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윤영근 회장과 ‘상민’이란 친구의 인연이 참으로 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시원찮은 수입으로 인해 생활이 궁핍했고 신문에 난 우체국 집배원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 90년경 동수원우체국 집배원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한 10년 정도 근무를 했으나 그 역시 수입이 적었던 관계로 이직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0년간 근무했던 퇴직금이 천만 원이 안 될 정도로 집배원생활의 고달픔을 일깨워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아직 남아있던 대출금 2천만 원 중 1천만 원에 대한 부담으로 수입이 좀 더 많은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때 찾은 곳이 바로 지금의 ‘미나리광 시장이었고 친구아버님이 연로하신 관계로 점포 운영 제의가 들어와 바로 승낙을 했다고 했다. 윤영근 상인회장은 당시 퇴직금과 여타 자금을 빌어 고추방앗간을 인수했다고 했다.

고추방앗간 점포인수 후 초기에는 고추나 방앗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고 거래처도 별로 없어 한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해서 영업이 끝나면 근처 식당을 돌며 영업을 했고 당시에 영업보다는 거래처라고 생각해 들른 식당에서 술을 마시곤 해 오히려 술값이 더 들어 갔다며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빚이 줄지 않자 추가 대출을 받아 꾸준하게 영업에 힘쓴 결과 하나 둘 씩 거래처가 늘어나며 매출이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동시에 고추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고추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현지까지 찾아다니며 지역 별로 고추의 특성을 파악 한 결과, 마침내 ‘고추’에 대한 자신만의 자료와 근거들이 정리됐고 이를 근거로 값싸고 품질 좋은 고추들을 공급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특히 경상북도 양양과 강원도 영월의 고추가 품질과 맛이 좋았고 가격경쟁력도 좋았다고 했다.

고객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이 늘었고 상인들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활동을 한 결과 2004년 드디어 ‘미나리광시장 상인회’를 결성하게 되었다고 했다.

시에 들어가 시장의 지적도도 띠고 정관 등을 작성하며 회의 내용 등을 첨부해 시청에 등록신청을 해 2005년 미나리광시장이 인정시장으로 등록이 되었다고 하며 뿌듯해 하기도 했다.

윤영근 상인회장은 난장판이었던 ‘미나리광시장’을 정상화 시키면서 일선에서 부지런히 시장을 위해 뛰었다고 했다. 먼저 ‘미나리광시장’에서 자리를 잡으신 선배 분들을 ‘예우’하고 행정적이거나 사무적인 일들을 제도적으로 정립시키며 총무 일을 열심히 수행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미나리광시장’의 상인회장직을 맡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미나리광시장’은 상인들의 평균연령이 68세 정도로 대부분 고령이며 상인들이 거의 대를 이어서 점포를 운영하시는 분들이라고 했다. 나름 집안에 크게 돈 걱정을 안 하시는 분들이 많아 시장 일에 그렇게 까다롭지 않아서 좋기도 하지만 또한 사회변화에 대한 적극성과 협력성 등이 부족해 약간은 아쉽기도 하다는 표현을 덧붙였다.

그래서 윤영근 상인회장이 제일 공들이는 부분으로는 상인들의 소통과 화합을 위한 행사나 모임을 자주 가지며 늘 서로를 위해 양보와 배려하는 분위기 조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즈음 사모님에 대해 묻자 무척 덤덤하게 대답을 한다. 누구나 연애당시 설렘이나 추억이 있기 마련인데 별 표정에 변화가 없다. 아마 성격 탓일 것이다. 인터뷰 내내 표정변화가 거의 없었음을 감안해야 했다.

윤영근 상인회장의 결혼과 연애는 참으로 담담했다. 88년 삼영전자에 근무 할 당시 같은 직장동료였던 처형(아내의 언니)이 자신을 이쁘게 봐 자신의 동생을 소개 시켜주었다고 했다.

윤영근 미나리광시장 상인회장 내외.

처음 선을 보던 1월 1일 날, 둘이 만나 특별한 얘기 없이 시간을 보내다 저녁때 언니네로 ‘떡국’을 먹으로 같이 갔는데 아내가 윤 회장이 맘에 들면 언니네로 가 떡국을 먹기로 이미 자매들은 작전을 짜고 있었던 걸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 아내는 윤영근 회장이 맘에 들어 묵묵히 윤 회장을 따라 언니 집으로 떡국을 먹으로 왔고 10개월 만인 89년 그해 10월 15일에 백년가약을 맺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워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아내의 하얀 얼굴과 눈이 너무도 예뻐 가슴이 설레였었다고 했다.

그 후 아내가 윤영근 회장의 자취방으로 찾아와 밑반찬도 해주며 ‘알콩달콩’ 연애를 즐겼다고 했다. 지금생각하면 결혼의 일등공신은 처형이었고 아직도 아내보다 처형과 더 친하게 지내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윤 회장은 부인과의 사이에 1남 1녀가 자녀 모두가 건강하고 착하게 자라 사회에서 한몫을 하고 있다고 한다. 31세 된 아들은 엔지니어로서 반도체회사에 다니며 회사 창업의 꿈을 키우고 있으며 29살 된 딸래미는 졸업 2개월 전 대학을 그만두고 예술 쪽 업종에 종사, 최연소 지배인으로 발탁되기 까지 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가슴 설렜던 연애시절과 가족사 이야기를 뒤로 하며 생에 대한 자신만의 삶의 철학을 묻자 상인회장다운 답이 나온다. “솔직하게 거래하자”란 표현이다. 사람이 솔직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원산지’는 물론 그램(무게)까지 철저하게 원칙을 지킨다고 했다. 그래서 언론에서도 양심적인 상인으로 여러 번 소개 된 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오마이뉴스’ ‘모닝와이드’ ‘수원뉴스’ 등 여러 언론매체에서 소개가 이어졌다고 했다.

끝으로 좌우명으로 다시 묻자 ‘미나리광시장’ 모든 상인들과 언제까지 “다 함께 잘살자”라는 말을 한다. 역시 마음이 너그럽고 푸근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추처럼 강하고 구수한 윤 영근 회장과의 인터뷰가 태양초 같은 신선함을 주었다.


경기남부 취재본부 김인종 기자  snakorea.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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