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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이화 나혜석 자료관 관장(수원시소상공인연합회 행궁동 회장)“조이화 관장을 보니 나혜석이 행궁동에 환생한듯 착각이…”
  • 경기남부 취재본부 김인종 기자
  • 승인 2020.02.1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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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이화 나혜석 자료관 관장이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잡았다.

【수원=서울뉴스통신】 대담 김인종 기자 / 글 김동초 대기자 =

생태교통페스티벌로 행궁동 일대 큰 변화 일던때
유명한 한식집 ‘화성옥’의 딸에서 행궁동 쌈닭으로
수원시와 싸우는 과정속 나혜석에 대한 깨달음
지금은 나혜석생가터문화예술제 등 진두지휘
“그래도 사람이 사람 만들어… 중요한 것은 사람”


<이혼고백서>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뺏으려고 합니다. (중략)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중략)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 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당시에는 사대부의 아낙으로서 생각속에 머무를 표현들이 대서특필 글로서 활자화시킨 정말 나다르크 스타일의 여성 선각자다.

특히 그림에 뛰어났던 나혜석은 1918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 후 10년간의 작품들은 관념적인 일본식리얼리즘으로 시작했지만 만주 안동현의 부영사인 남편 김우영을 따라 2년 동안 파리 등 유럽과 미국을 거치는 시기에 엄청난 미술적 변화를 겪는다.

당시 유럽의 대세였던 입체파와 야수파 화풍에 푹 빠졌고 <파리풍경> <스페인국경> 등에서 인상파의 색채가 강했고 <무히>나 <누드>에서는 야수파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녀의 글과 그림 대부분은 기성의 관념과 기존의 불합리한 제도를 과감하게 부정할 정도로 모두 대담했고 시대를 한 발 이상 앞서간 진정한 천재작가였던 것이다.

특히 1920년 3월에 김일엽이 창간한 ‘신여자’에 실린 나혜석의 4컷 판화는 가부장시대의 모순을 비판하는 작품의 진수를 보여주는 ‘절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도교 교주 ‘최린’과의 염문이 야기한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인한 사회적 냉대와 경제적 어려움 등을 견디지 못하고 천재작가 나혜석은 52세의 일기로 서울원효로의 시립자제원에서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무연고자로 사망하기에 이른다.

거의 드라마다. 정말 뛰어나고 걸출한 천재작가 여인을 받아내기엔 그 당시 조선사회의 그릇이 너무 작았던 탓이리라. 결국 그녀가 죽은 뒤에 ‘날아간 청조’·‘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등이 발간되기도 했다.

이런 나혜석을 조이화 나혜석 자료관리관 관장이 온 정열을 바쳐 ‘생가터 문화예술제’를 진행하고 나혜석의 작품과 자료들을 정성스럽게 모아 보존하며 체계화 작업을 하고 있는 곳을 찾은 것이다.

조이화 나혜석 자료관리관 관장은 인천에서 태어나 2살 때 수원 행궁동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어머님이 수원에서 제일 유명한 한식집인 ‘화성옥’을 운영하시는 관계로 주변의 인맥도 상당한 편이다.

하지만 조이화 나혜석 자료관리관 관장이 처음부터 사회활동에 능동적이며 문화 활동 등에 적극적이진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생각과 삶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은 2013년 발표된 세계최초 ‘생태교통페스티벌 장소’로 행궁동 일대가 지정되면서 부터라고 한다.

2012년 당시 ‘화성옥’의 1일 매출만 해도 5~6백만 원을 상회했다고 했다. 하지만 2013년 ‘생태교통페스티벌’을 위해 수원시가 ‘행궁동 일대’를 거의 뒤집어 놓았다고 했다. 갈아엎어 놓았을 정도라고 했다.

차량통행이 통제되니 고객들이 줄고 매출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축제를 준비하는 2012년 일 년 동안 3억5천만 원에 가까운 손해를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행궁동의 상인들과 함께 시를 상대로 무한한 투쟁을 벌이며 ‘행궁동 쌈닭’이란 닉네임으로 불려 지기까지 했다고 했다.

당시 분통이 터졌던 건 관청인 수원시가 ‘2013년 생태교통페스티벌’을 유치하고 준비를 하면서 당장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는 그곳의 상인과 주민들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후 수원시와 극심한 투쟁을 벌였고 수많은 접촉을 통해 차차 알게 된 점이 있다고 했다.

근시안적으로는 상인들이 피해를 입고 생활이 어려워지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보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란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래서 사회나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씩 열리기 시작했고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이 ‘나혜석’이란 인물이었고 그녀의 걸출하고 불행했던 일생을 통해 정말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조이화 관장은 ‘나혜석’이 수원에서 그것도 ‘행궁동’에서 태어난 것은 ‘축복’이라고 까지 했다. 아니 조이화 관장은 ‘행운’이라고 까지 표현했다. 그녀의 얼굴에 나혜석에 대한 ‘동경과 존경’을 그득 담은 아련한 그리움이 스쳐지나가는 듯 한 모습이 풍기기도 했다. 어찌 보면 나혜석과 닮은 조이화 나혜석 자료관리관 관장은 잠시 나혜석에 대한 ‘빙의’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조이화 관장은 원래 자신을 이기적일 정도로 개인주의자 였다고 했다. 어린 시절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화성옥’의 번창과 공직생활을 하는 배우자의 안정된 직장으로 인한 생활의 안정이 삶의 절실함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 공유보다는 개인적인 면을 중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혜석이란 꿈에 그릴 정도로 존경스런 인물을 알게 됐고 그로 인해 ‘나혜석생가터문화예술제’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당시 나혜석을 한 없이 짝사랑 하시던 한창석 회장님의 영향을 받아 더욱더 나혜석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전국에서 유일하게 주민이 주도하고 주민이 계획하고 주민이 실행하며 주민이 마무리 짓는 ‘주민주도형 행사’를 하고 있다고 한없는 자부심을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9년 드디어 주민들의 염원으로 ‘나혜석생가터길’ 선포식을 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했다.

조이화 관장은 최초의 여성위원장이며 2019년에 이어 2020년, 연임을 거쳐 2021년 내년까지(10~12회) 내리 3년을 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고 한다.

작년에 치러진 제11회 ‘나혜석생가터문화예술제’에서는 변변한 사무실하나 없는 문화예술제에 대한 부담과 자괴감으로 최대의 위기도 맞이했지만 지금은 임시지만 아담하게 커다란 꿈을 안고 이쁘게 꾸며 갈수 있는 나혜석자료관이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조이화 나혜석 자료관 관장은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는 나혜석에 대한 생각을 제대로 재정립 시킬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강조하기도 했다.

그녀의 일생이 시대를 앞서갔고 최린과의 자유연애로 인해 가부장적 개념이 강했던 시기에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그녀를 부정적인 인물로 각인 시켰지만 이 시대에 반드시 재조명을 해야 한다는 지론이다. 나혜석은 1919년 3·1운동 당시 김마리아, 박인덕, 김활란 등 여성 운동가들과 함께 비밀 집회를 열다가 체포되어 5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또한 약산 김원봉을 도우며 당시 펼쳤던 독립운동은 역사적으로 충분히 증명되었고 체포되어 치렀던 5개 월 간의 옥고는 평범한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이화 관장은 나혜석의 진실과 가치를 재조명하고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프랑스의 노예상인이었던 국민시인 ‘랭보’를 예로 들기도 했다.

조이화 나혜석 자료관리관 관장은 현재 인계동에 있는 ‘나혜석거리’를 옮길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해 ‘나혜석 생가터길’을 2019년 4월 28일 날 나혜석 탄생 123년 만에 선포하는 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나혜석 생가터길’은 ‘화령전’에서 시작해 수원시 신풍리 291번지 ‘나혜석생가’까지 약 500여m에 이르는 길이다.

이렇게 하나 둘 씩 나혜석에 관한 자료와 흔적들을 제도화시키면서 작년에는 임시지만 자료관을 마련하며 제도권 안으로 진행 중이라며 뿌듯해 하기도 했다. 전에는 동사무소나 생가터 옆에서 행사를 진행했고 늘 효율적인 행사와 진행의 어려움을 아쉬워했었던 기억을 아프게 떠올리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은 행궁동 주민들이 나혜석이란 인물을 통해 자랑스럽고 의미 있는 공통분모를 형성할 수 있게 됐고 함께 단합하고 소통하며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특히 자랑스럽다고 했다.

집안에서 풍족하게 지내며 주변과 특별한 교류가 없었던 ‘조이화 나혜석 자료관 관장’이 이렇게 행궁동과 친해지고 ‘나혜석’이란 인물에게 푹 빠질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이화 관장은 집안에서 운영하는 ‘화성옥’ 옆의 소유건물을 수원시가 ‘2013생태교통페스티벌‘ 준비사무실로 세를 들어와 사용했던 관계로 행궁동의 대표적 음식점이었던 화성옥 점주로 상인들을 대표해 그들의 현실적인 피해를 호소하며 거의 매일 수원시와 투쟁을 벌였다고 했다. 그때 생긴 별명이 ‘행궁동 쌈닭’이란 별명이 생겨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한 인연으로 제2회 생태교통페스티벌이 있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해 참석했었으며 제3회 세계생태교통페스티벌이 열렸던 대만의 카오슝시에서는 수원시민 40명을 인솔해 대만현지에서 ‘정조대왕능행차’와 혜경궁홍씨에 대한 ‘퍼레에드’와 수원의 상징인 ‘청개구리’를 선보이기도 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결국 이 와중에 자연스럽게 관을 상대하며 ‘시 행정’에 대한 이해도도 생겼고 관청과의 소통을 통해 수원시의 역사인물인 나혜석이란 걸출한 여류작가에 대한 정보도 접하게 되었으며 그 것이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된 일생일대의 사건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혜석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느끼며 이 자리까지 왔고 현재 마련한 ‘나혜석자료관’은 뜻을 함께한 모든 이들의 결실이며 특히 박승규 사무국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각별한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현재 조이화 관장은 ‘나혜석’이란 인물에게 쏟는 정열에 대해 진실한 만족감을 표시하는 한편 자식들에게도 삶의 가치를 일깨워 줄 수 있는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렇게 나혜석에 대해 자료관이나 ‘생가터문화예술제기념행사’를 꾸준하게 벌이는 동안 세계각지에서 SNS를 통해 나혜석에 대한 정보나 제보 등이 들어오고 있으며 학생들 또한 나혜석을 주제로 한 논문이나 과제 등을 다루는 관계로 많은 방문과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며 흐믓해 했다.

조이화 관장은 수원에서 신풍초를 거쳐 수원여중 그리고 창현고 1회 출신이다. 끝까지 ‘정치외교과’에 대한 꿈을 펼쳤지만 이루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수원청소년의회 교장직’을 맡으며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조이화 관장은 친구의 소개팅으로 결혼을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부군을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뒤에서 뻗어 나오는 황홀한 빛을 보았었다고 회상했다.

대단한 ‘아우라’를 지닌 인물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 그녀가 짓던 미소가 쑥스러움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부군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섞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녀는 아들과 딸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식들에게 상당히 엄한 엄마였지만 생태교통페스티벌을 통해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고 지금은 행사에서 자녀들에게 첼로연주를 시킬 만큼 온가족이 행사에 참여하며 주민들과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공통분모를 느낀다고 했다.

조이화 관장은 보기 드문 효녀라고 생각도 들었다. 어머님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어머님은 음식계통에선 우리나라 제일의 실력을 갖고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기억에 어머님은 동네에서 큰 행사가 있으면 사리지 않고 아무 대가 없이 오픈하는 일을 도우시곤 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님의 가게가 무척 바빴지만 열일 제쳐두고 남의 잔치를 도왔다고 했다. 그런 어머님이 분신처럼 이끌어온 ‘화성옥’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은 여러 가지 일이 많다보니 가업에 충실치 못해 어머님께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역상권이 침체된 요즘 소상공인들을 위한 지역상권활성화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심정도 내비쳤다. 장시간의 인터뷰를 마치며 자신만의 ‘좌우명’을 묻는 필자에게 간단명료한 답이 온다.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人)이 가장 중요하단다.

지금까지 살아온 생(生)의 여정에서 사람으로 인한 기쁨과 상처가 여러 번 교차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조이화 관장의 상당한 인적인프라가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사람을 중시하고 사랑 할 수 있어야 역사적이든 문학적이든 한 인물을 사랑하고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이화 관장이 ‘나혜석’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선각자에게 갖는 믿음과 애정과 신뢰가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사람’이란 단어를 다시 한 번 가슴에 품게 하는 정(情)이 흠뻑 묻어나오는 인터뷰였다.

나혜석 자료관을 나오면서 혹시 나혜석작가가 조이화 관장으로 환생해 수원행궁동에서 다시 생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하는 비약적인 상상을 하며 자료관을 나섰다.


경기남부 취재본부 김인종 기자  snakorea.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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