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원은 현장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풀뿌리 일꾼"

조문경 수원시의회 의원이 인터뷰에 앞서 밝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잡았다.
조문경 수원시의회 의원이 인터뷰에 앞서 밝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잡았다.

【 수원 = 서울뉴스통신 】 대담=김인종 편집위원장/글·사진=김동초 대기자 = 조문경 수원시의회 의원이 새수원신문과의 인터뷰에 앞서 밝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잡았다.

주로 ‘세상(世上)’이라 함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現實)’을 말한다. 여러 ‘군상(群像)’의 사람들이 서로 ‘인과관계(因果關係)’를 맺으며 이런 저런 ‘애증(愛憎)‘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 안에서 ’행복(幸福)‘한 일보다는 가슴 아픈 일, 힘든 일들이 더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끔씩 다가오는 행복이 더 고맙고 소중한 것이다. 보석의 가치는 ‘희소가치(稀少價値)’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세상천지에 널린 게 금이라면 금의 가치는 돌멩이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우리가 살면서 흔히 쓰는 말이 “세상사 내 맘 같지 않다는 말”이다. 모든 게 내 바람대로 쉽게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긍정의 힘’이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조문경 시의원이 딱 그런 스타일이다. 긍정과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첫 인상부터가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스타일이었다. 호감 형 이다. 역시 대화스타일도 남을 배려하고 섬세하고 챙기는 편이다.

 

정자동 동원 F&B 폐수악취 해결위해 최선 다해
정자1동 재개발과 '에듀타운'건립 내년 착공예정
주차장확보 시급한 현안… 예산 마련 방법 모색 중

조문경 의원은 64년도 우리나라 국민들이 보릿고개를 넘느라 힘든 시기에 전라북도 김제농가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1980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질풍노도(疾風怒濤)’시기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금천구 시흥동은 바로 옆에 안양이 위치한 서울의 최고 변두리였다. 그곳에서 공장생활 등 여러 가지 굳은 일을 하면서도 조 의원은 낙담하지 않고 앞날의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고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흔히 사람들은 머나먼 지방에서 서울이란 삭막한 도시로 올라오게 되면 낯설고 막막함이 앞설 것이다. 하지만 조 의원은 타고난 낙천성과 긍정적인 성격으로 당시 나이 또래의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생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또한 못 다한 학업을 이루기 위해 현대자동차 근무 시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최근에 아주대행정대학원을 수료하기도 한 집념의 인물이기도 하다. 인터뷰 내내 그는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지나간 일들을 음미하듯 회상했다. 분명히 아프고 힘든 시기였을 터인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표정과 모습이 온화했다. 덩달아 편안해 지는 기분으로 옛날로 돌아가 추억을 회상하는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 한참 정체성이 혼란스런 청소년기에 서울로 올라와 겪은 일들은?

농사를 짓던 집안에서 생계를 위해 가족이 모두 이주 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던 상태였습니다. 당시 금천구 시흥동은 고향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제가 평야였고 논이 많았던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고 생활수준은 거의 대동소이 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서울이라 인구가 좀 많았고 저는 그곳에서 고등학교 진학보다는 생업전선에 뛰어 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가방을 제조하는 공장 등 여러 회사를 다녀도 봤지만, 단순 노동보다는 장래를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껴, 정수 직업학교에서 ‘자동자 정비‘를 배웠습니다.

그 후 택시회사에서 자동차정비를 하며 직장생활을 하던 중 직업을 살려 운전병으로 군 입대를 했습니다. 

▲ 제대 후에 시작한 사회생활과 청년기의 과정은?

제대 말년이 되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겹치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군복을 입고 있을 때는 다 같은 군인의 모습에서 우열을 느낄 수 없었지만 정훈부대란 특성상 근무하는 병사들의 학력이 매우 높았기에 제대 후의 인생은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의 제대 후 계획은 주로 다니던 대학의 복학이나 상위직업에의 복귀였습니다. 저 역시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대 후 택시회사에서 정비를 하면서 공부를 했고 고등학교졸업검정고시를 합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89년, 현대자동차에 응시, 합격을 해 26세에 대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 할 수 있었습니다. 

매사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었던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군대생활과 청년기를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 수원과의 인연이 시작된 시기는?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지 10년 만인 99년, 드디어 제 사업을 위해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금천구 시흥동 공구상가 근처에 ‘시흥현대서비스’란 상호로 자동차정비 전문인 제 사업장을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 사업은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사업장 부지가 땅 주인의 개인사정으로 경매에 넘어가는 바람에 그 곳에서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집사람의 연고지가 있었던 수원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그 것이 수원과의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으로 전국이 떠들썩한 축제분위기 속에서 수원 정자동 택지개발부지에 사업장을 마련했습니다. 상호는 ‘현대 북수원서비스’로 정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업도 잘 풀렸고 그 때부터 지역 일에 동참하는 연결고리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서 생활안전 협의회, 수원시 향군협의회 등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와 안전에 대한 일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자3동 주민자치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주민들과 함께 땀을 흘렸습니다. 

▲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견해는?

저는 수원으로 내려와 거의 20여년 가까이 지역사회에서 사업을 했고 그 지역의 안전과 봉사 등에 참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지역정치와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런 자연스런 과정을 통해 지역 정치인들과 많은 교류를 하게 되었고 이어 정치와 사업은 긴밀한 협조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18년 지방선거 때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정자1·2·3동 지역에 출마 당선되어 비로소 지역정치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초의원들은 정치인이 아닌 일꾼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의원이나 국회의원들과 달리 현장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뛰며 현장 풀뿌리 일꾼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의원님이 생각하시는 시의원이란? 

정치 체계 중 지방자치란, 자치란 말 그대로 그 지방이 스스로 자치를 행하는 것입니다. 넓게는 광역시가 있고 작게는 소규모의 인구가 거주하는 아주 작은 지방 도시들이 있습니다. 수원은 125만 인구의 초거대 기초자치단체지만 각 행정구역이 ‘동(洞)’단위들이 있습니다. 그 곳의 몇 개 동을 책임지는 가장 말단의 정치인들이 소위 기초의원들입니다. 

기초의원들은 도의원이나 국회의원처럼 광역이나 국가의 정책을 논하고 추진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지역에서 해당 지역구 주민들과 함께 현장에서 주민들의 생활안전과 편리, 그리고 발전을 위해 항상 호흡을 같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행인들이나 학생들이 안전하게 보행 할 수 있는 펜스설치나 점검, 교통안전시설물 설치 필요성 판단, 교육이나 생활환경개선을 위한 제도적 기초 장치 마련 등을 위해 항상 현장을 방문하고 주민들과 만나 함께 소통하며 고민하는 게 그들의 기본업무이며 자세입니다. 

그러기에 기초의원들은 정치인이 아닌 시민들의 심부름꾼이며 주민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동네 친절한 아저씨같이, 아니면 자상한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사람들이 지역의 기초의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역구인 정자1·2·3동의 시급한 현안과 지역구민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기초의원들은 지역의 주민들이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임무입니다. 현재 정자동에는 동원F&B의 폐수로 인한 악취문제가 시급한 상황입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동원F&B의 이전입니다. 문제해결을 위해 회사 측과 심도 있게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어 정자1동 재개발과 ‘원예특작과학원’부지에 ‘에듀타운’건립을 추진 중이며 내년에 착공예정에 있습니다. 또한 주차장확보문제 역시 시급한 현안이지만 예산 등의 문제로 추진이 어렵지만 꾸준히 방법을 모색 중입니다. 열심히 하다보면 반드시 방법과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관계자들과 소통하며 방법을 모색 중입니다. 

지역구민 여러분도 코로나19의 암울하고 힘든 시기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 이 난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주민들과 함께 늘 소통에 힘쓰고 현장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지역구민들께 감사드립니다. 

▲ 의원님의 가족사와 좌우명이 있으시다면?

아내는 제 인생에서 가장 축복받은 선물인 것 같습니다. 아내로 인해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고 ‘희망(希望)’이라는 구체적인 싹을 튀 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아내는 종교 활동과 대학에서 한글 교육학을 재전공하며 중국인을 상대로 한글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저를 지지해 주고 ‘나 혼자’보다는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저와 딱 맞는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 제 좌우명이 있다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입니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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