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지역주민들과 소통하며 민원해결에 최선 다해나갈것”

김영택 수원시의회 의원이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잡았다.
김영택 수원시의회 의원이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잡았다.

【 수원 = 서울뉴스통신 】 대담=김인종 편집위원장/ 글·사진=김동초 대기자 = 소백산 중턱에 자리한 충북 단양(丹陽)은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청정지역이며 팔경(八景)이 ‘수려(秀麗)’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단양팔경(丹陽八景)’은 예로부터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보다 더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곳이다. 남한강 상류의 도담삼봉, 구담봉, 옥순봉 등의 경치는 가히 우리나라 풍경의 ‘백미(白眉)’라고 여겨진다. 경치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곳에 거주하는 인물들도 좋은 경치만큼 좋은 인물들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김영택 시의원은 그런 아름다운 단양에서 1969년 11월, 농사를 짓던 집안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6살 때 시멘트 공장이 밀집해 있었던 매포읍으로 이사, 매포초와 매포중, 그리고 단양공고를 졸업했다. 김 의원은 집안일을 돕다 90년 1월 입대해 논산에서 신병교육 4주, 경찰학교에서 4주간의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전남기동8중대 전경으로 복무하며 5·18, 10주기 현장에 투입되는 등 만만치 않은 전경생활을 마치고 무사히 전역을 했다고 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김의원은 92년 전역 후 6개월 만에 매포읍에 있던 시멘트제조회사였던 ‘성신양회’에 입사,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을 입지전적 인물에 비유하기도 한 김 의원의 인생여정은 나름 질곡이 심한 풍랑의 연속이었던 느낌이 들었다.

현재 그는 더욱더 실질적인 민원해결을 위해 경기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다. 그의 힘찬 의정활동이 기대된다.
 

수많은 삶의 질곡 겪으며 조석환 의장통해 정계 입문
때로는 제도권밖에 있을때보다 힘든 의정활동이지만
모두가 힘 합치면 어려움 이겨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

▲ 의원님이 생각하시는 성장기의 추억이란?

6살 되던해 집이 단양에서 매포를 이사를 했고 그 곳에서 매포초와 매포중을 거쳐 집안사정으로 실업계인 단양공고에 입학해 학업에 열중했습니다. 당시 감수성이 예민할 때인 사춘기 기억은 무난했던 성격으로 별 탈 없이 착한 학생으로 성장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사회생활 당시 나름 힘든 시기를 거쳤다고 하는데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요?

92년 전역 후에 매포읍에 있던 시멘트제조회사에 입사를 했습니다. 당시 유명했던 ‘천마표시멘트’란 제품을 생산하는 ‘성신양행’이라는 회사였습니다. 1990년 초는 우리나라가 전국적으로 건설 붐이 일던 시기라 시멘트 수요가 엄청 많았고 시멘트제조회사들도 호황을 누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만큼 회사는 활기찼고 그에 따른 노조활동도 활발하던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성신양행 품질관리과로 발령을 받아 실험실에서 근무를 했는데 제가 가장 막내 였고 위의 6명 모두가 학교선배들 이었습니다.

제 위 선배들이 모두 저보다 10년 이상 나이차이가 났었기에 어린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귀여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노조활동이 활발했던 관계로 위원장 선거 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저 역시 그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당시 노조는 파벌이 심해서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회사생활의 성패가 갈릴 정도였습니다. 노조가입 후 대의원 출마를 권유받아 당선되어 대의원생활을 해오던 중 파벌싸움에 연루되어 대기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실험실에서 생산라인으로 발령이 났고 한 달 정도 근무를 했지만 결국 저는 견디지 못하고 입사 2년 만인 94년, 퇴사를 하게 됩니다.

▲ 수원과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는?

저는 고향을 떠나 94년 11월, 수원에 있던 ‘삼성코닝’이란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코닝은 브라운관을 제조하는 회사였고 저는 ‘환경안전 팀’에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수원평동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삼성코닝에서 10년을 근무 한 후 명퇴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명퇴자 중 10%는 삼성 계열사로 갔지만 저는 완전퇴직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영주출신으로 풍기에서 인삼사업을 하는 집안의 아내를 친구소개로 만나 결혼을 했고 나름 수원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수원을 고향으로 한 든든한 아들도 둘이나 탄생했고 32세가 되던 해에는 인계동에 집도 장만하며 삶에 의미를 한껏 느끼던 시기였습니다. 수원에서의 흥미진진한 삶의 서곡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 그 후 기복이 심한 삶의 질곡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삼성코닝 근무 시 저는 주식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퇴사 후에는 본격적으로 주식투자를 했었습니다. 그로인해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고 결국 주식으로 집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날리고 세류동으로가 전세를 살았습니다.

당시 그래도 틈틈이 모아두었던 일부 자금으로 아주대 앞에서 생맥주집을 오픈, 아내가 운영을 했고 저는 직장생활을 하며 열심히 살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악재는 겹쳐서 온다는 말처럼 친 동생이 교통사고가 나서 전세금은 물론 대출을 받아 치료비를 충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이들이 어려 한참 관심과 손이 많이 가는 시기였지만 동생치료와 병간 등 경제사정 악화로 무척 힘든 시기였고 결국 근·퇴 불량으로 퇴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97년 IMF직전, 맥주 집을 정리하고 밀리오레와 세파월드 복합 쇼핑몰에서 아동복을 취급하는 점포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아내와 제가 생업전선에서 밤낮으로 뛰었던 관계로 아이들에 대한 보살핌이 너무 부족했었습니다. 지금도 그 부분이 제일 후회스런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 언제 쯤 원만한 생활패턴으로 돌아가셨는지요?

그 후, 두 군데 아동복코너 운영을 접고, 문구점을 차렸지만 운영이 순탄치 않았고 계속 불어나는 채무로 저는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잡부생활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3년 정도 시련기 동안 아내는 우울증까지 왔고 결국 휴식을 취해야만 하는 위증한 상태까지 갔습니다. 정말 커다란 위기가 닥쳤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 악착같이 버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반전의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잡부로 일하던 농수산물시장의 점포주가 저를 눈여겨봤고 성실히 일하는 모습을 좋게 평가해 기회를 주었습니다. 1톤 트럭으로 물건 배달 및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주로 납품하던 물건이 콩이었는데 10군데 정도에 콩을 납품하는 납품권을 제게 할당해 주었습니다.

마른 ‘콩’을 한 부대에 5만 원 정도에 구입해서 물에 불려 납품을 하면 한 부대에 거의 25만 원 정도의 이익이 발생되었습니다. 하루 이익으로 상당히 큰 액수였습니다. 그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아내가 ‘소분작업’을 맡아 땀을 흘리는 사이 우울증도 함께 치유가 될 수 있었습니다.

▲ 정치와 연을 맺게 된 계기는?

2년 정도 ‘콩’을 취급하며 꽤 많은 수입을 올렸고 이어 유통사업 쪽으로 진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무난하게 이어오고 있으며 아내는 현재 이마트에서 ‘국대떡볶기’ 점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되찾으며 저희 가족은 광교신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아파트 동 대표와 회장 등을 맡아 주민들과 호흡하며 활발하게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리드해서 봉사단체를 결성했고 많은 일들을 접했습니다. 당시 아파트 입주민들의 민원이나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안들을 접하며 한계를 느껴 정치 제도권으로의 진입이 절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아파트 총연합회 운영위원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현재 수원시 의회 의장이신 조석환 의장의 시의원 출마 時 선거운동을 적극도우며 출마를 결심했고 드디어 2018년 지방선거 時 민주당 소속으로 광교1·2동을 지역구로 해 5명의 경쟁자와 경선을 거쳐 시의원에 도전, 당선으로 정치 일선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 정치일선에 입문해서 느끼신 소감은?

시의원이 되어 정치일선에 들어서면 지역민원이나 현안들이 쉽게 풀릴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정치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의원의 한계가 있고 그럴 때 마다 느끼는 실망과 좌절감은 제도권 밖에 있을 때 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하나하나 풀어나갈 생각으로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항상 지역 주민들과의 현장소통을 통해 실체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민원해결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 지역구민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메르스 사태 때도 봉사 팀이 모여 광교 전체 방역을 하며 열심히 힘을 합친 기억이 선합니다. 이번 코로나사태도 모두 함께 힘을 합쳐 이 위기를 극복했으면 합니다. 또한 현재 광교는 지역상권이 너무 열악한 상황입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상가들이 공실이고 그로인해 지역경제가 너무 침체 됐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힘든 시기이지만 최선을 다해 지역경제를 살리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힘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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