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의원은 생활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하는 일꾼이라 생각"

김진관 수원시의회 의원이 인터뷰에 앞서 밝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잡았다.

【 수원 = 서울뉴스통신 】 대담=김인종 편집위원장/ 글·사진=김동초 대기자 = 김진관의원은 1953년 6·25전쟁이 막 휴전을 맺은 다음해인 1954년 충북 청원군 남이면 외천리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한 10여명의 대가족이 한 집안에 살았지만 소유하고 있는 땅 한 평도 없는 그야말로 ‘빈농’중의 빈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님이 종손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셔서 초등학교 6학년을 두 번이나 다니며 중학진학에 힘썼지만 결국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포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 의원은 후일 검정고시를 거쳐 한경대학교에서 행정학을 공부하다 2학년 때 개인사정으로 중퇴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김진관 의원의 성장기와 삶은 매우 긍정적으로 즐겁게 열심히 살아왔다고 했다. 수원이란 125만 거대도시의 의회 의장을 지낸 것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김진관 의원은 우리들이 말하는 낙천적인 인본주의자이며 대표적 ‘입지전적(立志傳的)‘인물이다.

▲ 의원님의 어린 시절 성장기가 무척 험난했다고 하는데?

당시는 모두 어려웠습니다. 풍족한 게 오히려 이상 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저희 집은 가난 속에서도 최고로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저는 종손 집안에서 장손으로 태어나 귀여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할아버님은 종손으로서 최소한 중등교육은 시켜야 한다며 제 중학교 진학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워낙 가난했던 관계로 집안 형편이 나아지길 기대하며 초등학교 6학년을 2번이나 다니면서 중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결국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후 ‘시골지서’(지금의 파출소, 지구대)에 사환으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봉급이 1700원이었던 걸로 기억되며 경찰들의 구두도 닦고 문서수발도 하는 등 잡무를 맡아서 했습니다. 2년 후 봉급이 3,000원으로 올랐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시내 약국의 점원과 자동차 부품을 판매하는 가계에서 일하기도 하며 생활전선에서 뛰어야 했습니다.

▲ 청년기의 생활은 어떠하셨는지요?

저는 초등학교 입학 전인 6세 때 동네아이들과 호기심에 작두를 가지고 놀다가 손가락을 다쳤습니다. 그래서 군대가 면제됐고 할 수 있는 일에도 약간의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점포에서 사환생활을 전전하다. 20세 때 아버님을 따라 ‘송탄’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3년 정도 주류도매업체에 들어가 물건 배달도 하며 송탄에서 생활하다 23세 때 인천 ‘계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당시 자전거로 막걸리 배달을 했는데 ‘짐’ 자전거를 개조해 막걸리 13통(13말)을 한꺼번에 배달하기도 했습니다.

‘술’과 ‘담배’를 못했기에 성실하게 일을 할 수 있었고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할 수 있었습니다. 힘들고 팍팍한 현실이었지만 그래도 즐겁고 행복하게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결혼해서 딸 둘을 키우며 7년 간 인천 계양에서 생활을 한 후 아버님의 부름을 받아 다시 ‘송탄’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됩니다.

▲ 송탄·수원에서의 삶과 사업이 시작된 계기는?

연탄배달 등 막일을 하며 먼저 송탄에서 자리 잡고 계신 아버님의 소개로 미군전용 택시를 운전하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할 줄 몰라 손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했고 택시운전도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딸들의 교육을 위해 86년도에 수원으로 이사를 와서 ‘부국교통’이란 택시회사에 입사해 열심히 운전을 했고 노조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 3년 간 택시운전을 해서 개인택시를 받을 수 있었고 5년 간 열심히 택시운전을 했습니다. 그 후에 수원 충청향우회에서 만난 지인의 권유로 개인택시를 팔아 5천만 원 정도의 사업자금으로 건설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건설업에 대한 전문 지식 없이 지인의 말만 믿고 일을 시작했다가 IMF로 인해서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그동안 연탄배달로 모아 놓은 재산까지 모두 부채를 갚는 데 소진을 해서 그 당시 매우 힘들었습니다.

▲ 정치와 인연이 된 계기는?

1980년대 노조 활동을 하면서 그 당시 야당 정치인들과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을 했고 4개월 후에 지방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우만동에 출마할 후보가 없어서 세류동에 살고 있던 제가 선거 40일전에 우만동에 사무실을 열고 선거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후보기호를 추첨으로 했는데 운이 좋게 ‘가’번을 뽑았습니다. 하지만 우만동에는 아무 연고도 없었기에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충청향우회를 기점으로 열심히 뛰어 당선되었습니다.

▲ 초선 때의 활동과 5선인 지금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주신다면?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초선 때는 정말로 열심히 뛰었습니다. 동사무소 앞길에 인도도 만들고 마을버스 노선도 유치하고 경로당에 도시가스난방도 설치하는 등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심히 한 결과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삼선까지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4선 도전 때 ‘나’번 공천을 받아 낙선하였고 2014년에 다시 도전해 4선에 당선되어 제10대 후반기 수원시의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지방선거를 통해 5선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지역주민들이 저에게 보내주신 신뢰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며 저 역시 최선을 다해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현재 느끼시는 기초의원직에 대한 소회라면?

저는 기초의원은 동네 일꾼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주민들과 직접 ‘조우(遭遇)’하는 기쁨을 누리며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기초의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초의원은 말 그대로 생활현장에서 뛰는 일꾼입니다. ‘당리당략(黨利黨略)’과 ‘정치공학(政治工學)’과 당 소속에 휘둘리지 않는 기초의원들의 영역을 마련해주어야 진정한 풀뿌리민주주의가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 지역구민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5선 의원이 되기까지 저를 믿고 선택해 주신 지역주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주어진 임기까지 지역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한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우리 모두가 힘겨운 한 해를 보냈습니다.

우리 다 같이 힘을 모아 하루 빨리 코로나가 없었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역주민 여러분 모두 건강관리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의원님의 가정사와 좌우명이 있으시다면?

어려웠던 시기에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서로 힘을 합쳐 열심히 살았습니다. 집사람은 제가 그 어려운 시기에 아무 불평 없이 묵묵히 저를 지탱할 수 있게 해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두 딸과 외손자 외손녀가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

그리고 제 좌우명은  “진실하게 살자”입니다.

‘생(生)’을 살아감에 만나는 이들과 서로 진실하게 대하고 상대를 위한다면 삶은 즐겁고 값진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최선을 다해 남을 배려하고 모든 이들을 존중하면 행복은 저절로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늘 함께 열심히 생활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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