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몸에 ‘가시’가 돋는다”

이철승 수원시의원이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했다.
이철승 수원시의원이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했다.

딱 봐도 스포츠맨 스타일이다. 짧은 머리에 다부진 체격으로 하얀 피부를 갖춘 전형적인 체육인의 분위기를 풍긴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미소가 좋으며 예의가 무척 바르다. 순간 일본을 넘어 세계를 호령했던 바람의 파이터인 ‘최배달’ 최영의씨가 강하게 오버랩 되었다. 

코로나19로 청사가 한산한 가운데 지하주차공간의 여유가 눈에 띄게 늘었다. 나름 한가로움을 느끼며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309호실 이철승 의원의 집무실은 일전 엄청나게 친근감을 가지고 ‘토크쇼‘같은 인터뷰를 했던 ‘핸섬 가이’ 이희승 의원과 한방을 쓰고 있었다. 이름의 돌림자가 같은 관계로 혹시 인척이 아닐까라는 연상 작용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둘 다 젊고 잘생겼으며 진취적인 스타일이다. 전형적인 스포츠맨타입의 젊고 예의 바른 시의원인 이철승 의원은 깔끔한 귀공자 타입 과는 달리 인생여정이 드라마틱 했고  극도로 치열하게 삶을 온몸으로 받아낸 인물이었다. 

마치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型棘)라는 말처럼 하루라도, 아니 “‘한시’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몸에 가시가 돋는다“(一時不動勤, 身中生型棘)고 했다. 

소띠 해에 태어난 이철승 의원은 신축년의 ‘하얀 소’처럼 모습도 우직하고 근면한 ‘소’의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인터뷰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술회하며 기초의원으로서 앞날에 대한 열의와 목표를 진지하게 풀어나가는 자리였다. 

 

코로나로 힘든 소상공인 지원 우선
아내가 붙여준 별명이 ‘일 중독자’

문. 의원님의 성장과정을 간략하게 말씀해주신다면.

저는 1973년 수원시 세류동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2살 때 화서동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아버님은 경인일보사에 근무를 하셨고 사회적으로는 나름 ‘오피니언’의 길을 걸었던 분이셨습니다. 

화서동의 넓은 벌판과 푸른 자연 속에서 성장한 저는 화서초와 권선중을 거쳐 효원고로 진학을 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모두 신설학교로 입학 당시 2학년선배들만 있었고 저는 중·고 모두 제2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1993년 군에 입대, 수원전투비행단에서 복무를 마치고 96년 장안전문대 경영학과로 진학을 했습니다. 후일 수원대 사회교육원에서 아동복지를 전공했고 2017년부터 아주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며 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문. 사회에서 시작한 삶 현장이 꽤 다사다난 하셨는데.    

군 제대 후 조금 늦게 대학 진학을 준비하며 당시 선배들이 운영하던 이삿짐센터에서 7~8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 후 삼성전자대리점에서 가전제품(냉장고나 세탁기 등)등을 배달하며 등록금을 마련했고 막노동 등 이것저것 학비마련을 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야간에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졸업학기에 화성시에 있었던 아남반도체 산전사업본부 총무과에 입사, 인사와 교육, 그리고 구조조정에 관한 인사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부 직장상사들도 정리해고 명단에 들어갔는데 이를 짐작한 해당간부가 불안해하며 “이제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앞으로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들으며 정말로 많은 스트레스와 사회의 냉혹함에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어릴적 꿈이였던 경찰공무원 준비를 했습니다. IMF위기에 대기업을 퇴사하며 경찰 준비를 했지만 실패를 하기도 했습니다.

문. 사업을 시작하신 동기와 그 후의 과정은.

비정한 기업의 현실을 실감하고 나니 직장생활에 대한 미련이 딱 끊겼습니다. 그래서 99년에 선배를 포함, 친구들과 분당에서 IT분야 사업(인터넷벤쳐 축구 포털 커뮤니티사업)에 진출하게 됩니다. 

축구에 관한 분야로 축구교실운영 및 동호회 연계 및 실시간 운동장예약시스템등과 매니지먼트 등 인터넷을 통한 전반적 사업이었는데 아직은 일반인들의 인식이 오프라인에 머물러있는 상태였고 수익구조가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2000년, 1년 반 만에 법인을 정리했습니다.

그래고 전에 IT사업을 할 당시 저를 눈여겨보았던 선배님께서 천안 쪽에 있던 자신의 사업을 도와달라는 제의를 받고 천안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은 ‘한성 에코넷’이란  코스닥기업으로 총무업무보다는 적성에 맞는 영업 파트를 맡아 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리고 2년 반 후 ‘JU그룹’이라는 다단계 그룹에서 우회상장목적으로 회사주식을 대량매입하며 회사가 사라지는 바람에 각 사업부서가 파트별로 분리되었고 저는 ‘한얼ECI’란 상호로 수도권영업소장(서울·경기·인천)으로 독립해 나오게 됩니다. 

문. 지역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이라면.

2000년 쯤으로 기억되는데 사업을 할 당시에 저는 어떤 TV다큐에서 외국의 지방자치의원들에 대해 소개하는 프로를 보게 되었고 지역사회에서 소통하며 존경받는 모습에 나도 그들처럼 지역사회에서 봉사하며 소통하고 사랑받는 의원의 역할을 해보고자하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막 결혼한 아내에게 나는 반드시 10년 후에 지역구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장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내가  '부채나 갚고 집을 장만한 다음에 생각하자'고 하며 저에게 말한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정치를 하기에는 우리경제사정도 넉넉지 않고 막내도 태어 난지 얼마 안 돼 정치입문이 어렵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오히려 10년 전 제가 정치참여를 얘기했을 때 “먼저 빚을 갚고, 집을 장만한 다음에 하라”고 말렸지만 “지금은 빚도 갚고 집도 장만했는데 무엇을 망설이느냐, 그리고 망하면 ‘일’ 중독이 걸린 당신이 다시 일해서 갚으면 된다”고 농담처럼 말을 하며 저에게 ‘용기와 부담’을 함께 주는 기지를 발휘하며 도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공천을 받아 2014, 6·4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서둔동, 화서1·동, 매산동, 매교동, 고등동)로 당시 ‘새누리당 텃밭’에서 ‘2-나’를 받아 당선, 지역정치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문. 당시 정치인에 도전하기에는 상황이 매우 열악했었다고 하셨는데.

아내가 저에게 용기를 주기위해 선거출마를 허락했었지만 당시 제 가정형편 상황은 좋지않은 편이었습니다. 넉넉지 않은 경제여건은 물론, 아내가 첫애를 출산하고 수년간 유산이 거듭되다가 거의 8년 만에 둘째와 셋째를 연달아 출산, 무리한 육아로 몸이 많이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민주당내에서도 지역의원 ‘무공천제’를 택하는 쪽으로 정치기류가 흘렀는데 당시 안철수 대표와의 합당으로 공천제로 회귀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출마준비를 하다 민주당의 공천을 받았지만 당시 팔달지역에서 기호 2-나번은 당선이 불확실했었습니다. 하지만 제 특유의 도전정신과 성실성 또한 함께 응원해주셨던 많은 분들과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 당선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문. 코로나로 모두 힘든 시기입니다. 지역 주민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은 정책도 중요하지만 지역경제 활성화가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특히 저희 지역구에는 소상공인들과 영세자영업자가 많습니다. 그들에게 市나 道, 또는 정부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이 난국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 정부가 영세 소상공인들을 구제해야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저도 지자체 시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저는 시의원이 되기 2년 전부터 원일운수에서 영업용택시를 몰았고 의원에 당선되고 나서도 6년 정도 더 택시운전을 했습니다. 다른 의원들보다 더 밑바닥 정서와 여론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더 어려운 시기지만 여러분 모두 부디 힘내시기 바랍니다.

문. 의원님만의 가정사와 좌우명이 있으시다면.

제가 21살이 되던 해 선배 누나의 동생이었던 아내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첫 사랑이 쉽지 않듯이 헤어지게 되었으나 10여년을 친구처럼 지내다가 제가 끈질기게 청혼을 한 끝에 2004년 10월 30일 첫사랑인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3·1절 둥이 첫 애를 출산했습니다. 

아내는 저의 모든 것입니다. 그냥 고맙고 아직도 늘 미안할 따름입니다. 부디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저랑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결혼 후 6개월 만에 출산을 했고 둘째딸과 셋째아들은 8년 만에 2012~13년, 연년생으로 낳았습니다. 너무 사랑스럽고 저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좌우명은 “평범한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입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적극적으로 삶에 임하며 노력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난국도 헤쳐 나갈 수 있으며 반드시 자신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기량으로 야구선수의 대표 모범선수였던 ‘이승엽’선수도 같은 말을 했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 ‘일 중독자’란 소리를 들을 만큼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심히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나서 인생을 논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저를 아껴주신 모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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