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깨어 나자마자 밤사이에 어수선한 꿈을 지우고, 마음속으로 ‘오늘도 건강하고 즐겁게 하루를 보넬 수 있게 해주세요’ 하고 막연히 빌면서 시작한다. 나이 먹어서 생활의 초점은 잘되기를 비는 마음 뿐이다 보니 모든 것이 마음속 기도이고, 축원이다. 아마 정신은 아직 살아 있지만 육체는 녹쓸어 고장의 단계에 접어들 다 보니 행동보다는 마음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기도는 자신이 희망하는 바를 이루어지길 비는 것이다. 일상에서 주로 사용하는 문구를 보면 인생길을 ‘성공하길 빈다’. ‘행복하길 빈다’ 로부터 시작하여 생활속에서 ‘합격하길 빈다’. 등 자신이 살아가면서 닥친 인생의 파도를 헤처 나아가기 위한 절대자의 도움을 빌리고자 함이다. 그러나 기도는 해결의 방법이 아니고 자기극복의 방법이면서 삶의 모색의 방법이다.

언제 부터인가 가족 모임에서 사돈을 만나면 기도가 생각나고 오늘은 무슨기도를 할러나 하는 생각과 은근히 기다리는 마음이 생긴다. 지난번 나의 생일과 아들회사의 코스탁 상장 기념 모임에서도 사돈은 모두의 건강과 회사의 발전을 위하여 기도 하였다. 몇일전 모처럼의 사돈간 골프모임에서도 시작 전 세 사람이 모여 감사와 건강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사실 기도는 어렵다 우선은 모든사람이 하지않는 행위이니 남의 눈치를 안 볼수가 없다. 그리고 참석자가 원하는가 하는 생각도 해봐야 하고 장소도 문제가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석한 사람들의 한 사람씩 모두 거명하면서 보편적으로 그사람이 원하는 바를 알아내어 이를 이루도록 기원한다. 그리고 건강과 행복을 기원 해야 하고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안녕도 기원 해야 하니 어렵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어려운 기도를 사돈은 잘하고 있다. 아마 모임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메모를 해두고 읽기도 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육이오 전쟁후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에는 교회에서 주는 문구와 먹을거리를 받아 먹기위해 교회에 다니기도 하였다. 특히 크리스마스에는 교회안이 꽉 차기도 하였다. 진주 경찰서옆에 있는 안식교회에서 아침 일찍 나가 교회 주변 청소를 하는 나를 목사님내외는 귀특하게 보고 간혹 식사도 제공해 주면서 열심히 교회에 다니도록 격려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2학년 까지 교회의 각종 행사에도 참가하는등 교회서적을 탐독하고 진실한 교인인 된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여러 사이비 종교가 사회에 난립하던 시기였다.

그당시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누님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견직공장에 여공으로 일하였다. 나는 누님이 주는 수업료로 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보니 누님의 월급날을 손곱아 기다렸다. 수업료가 밀리면 학교에서 선생님의 잔소리를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삼개월이 밀린 수업료 독촉으로 내일은 꼭 내어야 하는데 누님이 월급을 타오기만을 책상앞에서 기도 하였다. “오늘 누님이 월급을 타오게 하여 주시십시오“ 간절한 기도의 덕분으로 월급날이 아닌되도 생각지 않은 누님이 월급을 타오고, 나는 다음날 기분좋은 등교를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간절한 기도는 이루어 진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의 영향이 오늘에 와서 나에게 기도에 대한 조그만한 믿음을 갖게 해주므로서 좋은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 것 같다.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기도는 하고 싶다. 기도란 결국은 내가 마음속으로 염원 하고 있는 바를, 마음속으로 원하는 소리 없는 바램을, 대신하여 소리 나게 말씀 해주시는 것이라 생각이다. 그래서 “사돈! 기도 합시다” 라고 마음으로 재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예의 바른 사돈은 교회의 장로이다. 반드시 먼저 나에게 “기도 먼저 하고 또는 지금 기도 하겠 습니다.” 라는 양해를 구하고 시작한다.

사실 처음 아들이 결혼 할때에는 며느리가 교회를 핑계로 우리집 가풍을 바꾸어 놓을가 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하였다. 교인의 집안에서 자란 며느리가 신랑이 마음에 들어서 인지 이를 확인하는 서약서 까지 써면서 사돈의 동의를 받아 결혼을 하였다. 세월이 흐른후 손주가 태어나서 부터는 그간의 제사나 조상 모시기등, 가풍에 대해 열심히 배워 하는 걸 보고 교회에 다녀도 좋다고 승낙을 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처사로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사돈이 퇴직후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교인들의 직접 투표에 의해 장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나서부터 사돈이 다니는 교회에 가는 일이 생겼다. 장로 임식 기념 예배에 참석하였다. 교회에서 처음으로 대표 기도 하는 날 참석하는 등 서울까지 가서 교회행사에 참석하였다 교인으로서가 아니라 사돈으로서 참석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사돈 관계가 형제간보다 더 친해지게 되었다. 매년 함께 하는 김장 행사나 금년 부터 하게된 명절 함께 지내기는 대표적인 행사이기도 하다. 스스럼없이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생의 동반자로서 서로 기대면서 살아 가게 되었다. 사부인의 배려와 베푸는 마음이 단연 돋보이는 관계 접착제 역할을 한다. 사부인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주변사람들은 부러운 눈초리로 또는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물어 본다고 한다. 시골에 올때도 자랑을 하고 온다고 한다. 어떻게 지내면 그렇게 되는가? 하고 물어 보는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사돈의 기도 덕분에 나의 건강도 잘 유지되고 있고 아들 회사의 발전도 있었다는 생각을 갖고있다.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돈의 기도는 간절함이 숲속을 지나는 환자의 애절한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기도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숙연함을 더욱 빛나게 한다.

 

하봉수 수필가
하봉수 수필가

- 46년 경남 진주출생

- 방송통신대 졸업

- 경기대 행정 대학원 석사

-《좋은 문학》신인상 등단

- 수필집《인생계단 오르기》

- 경기수필가 협회회원

- 수원 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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