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서 나혜석이 출생한 것은 수원의 큰 자랑입니다”

【수원=서울뉴스통신】  류재복 기자 = “수원에서 그런 걸출한 문화인이요. 독립운동가요. 화가로서 유명 여류인사가 배출된 것은 고향이 수원인 저로서는 자랑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혜석 그 분을 위해 오랜세월을 몸 바쳐온 것 같습니다” 지난달 16일 오전 수원에 있는 새수원신문사에서 ‘나혜석기념사업회’ 유동준 회장(82)이 기자에게 들려준 말 이었다. 기자로서 첫 대면을 한 유동준 회장, 그는 매우 건강해 보였고 활력이 넘치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80대의 수원 토박이였다.

기자가 나혜석과의 인연을 질문하자, 그는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중 3때 내가 태어난 고향인 수원에 유명한 문학인 3명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바로 나혜석, 홍여우, 홍사용 세 사람인데 그중 나혜석이 여자로서 더 유명한 것을 알았다. 계란으로치면 껍질은 홍사용, 흰자는 홍난파, 노란자가 바로 나혜석이었다. 더구나 그는 화가요 문학가였다”고 말했다.

나혜석(羅蕙錫)은 여성해방 혁명가요, 순교자이며 화가, 문학가였다. 1896년 4월 28일에 수원에서 태어나 1948년 12월 10일에 타계한 한국의 화가로 특히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신여성이며, 또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부친 나기정은 일제 강점기에도 용인군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나혜석은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1913년 경성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에 유학, 동경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1918년 귀국, 교사로 근무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의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상하는 등 실력을 인정 받았다. 그후 나혜석은 3·1 운동에도 참여했으며, 일본 유학중 만난 엘리트 변호사 김우영과 1920년 4월에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결혼을 했다.

서울농대 졸업후 시인 되고 싶어 서정주 선생과도 어울려
군복무 마친 후 나혜석 위한 행사 만들기에 집중

1921년 9월 당시 안동현(현재 중국 단둥)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사했고 ,당시 여성들을 위한 야학을 열기도 했다. 1927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유럽 여행중 프랑스에 도착해 야수파 화풍을 공부했다. 그러나 파리 한인 사회에 화제거리가 된 최린(천도교 집사)과의 염문설이 빌미가 돼 1930년 이혼을 당했다.

나혜석은 이혼후에도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와 제12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특선과 입선을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김우영과의 사이에서 낳은 3남 1녀와도 남편의 방해로 만나지 못하면서 폐인이 돼 불행한 생활을 하다가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자제원에서 사망해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되고 그가 태어난 집도 현재는 집터만 남아 있다.

유동준 회장은 56학번으로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군 입대를 앞두고 있을 때 불현 듯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미당 서정주 선생과도 어울리곤 했다. 이때 유 회장은 대학동기인 한 여성에게 나혜석 추모의 밤을 열자고 말했다. 그러자 그 여성은 여자에 대한 행사를 남자가 나서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당시는 가부장적인 사회분위기였기에 충분히 그럴만 했다. 그러나 유 회장은 “내 친구 여성들이 좀 나서 봐라”고 부탁후 군에 입대를 했다.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친 유 회장은 타 지방에 있는 유엔관련 기구에서 근무를 하는 바람에 수원을 떠나 있었지만 그는 한달에 한번씩은 수원엘 찾았다.

유 회장은 이전부터 이미 나혜석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에 수원시가 주최하는 어느 해 현충일 행사를 마치고 수원출신 국회의원 3인, 그리고 당시 수원시장 이호선 시장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때 유 회장은 그들에게 “수원에 나혜석이란 걸출한 문화인물이 있는데 1년 12달이 수없이 지나도록 수원시 행사에 ‘나혜석’의 ‘나’자도 안보이니 웬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들은 “좋다. 우리가 한번 추진해보자”고 모두가 의기투합해 나혜석에 대한 행사를 적극 전개하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1년이 가고 2년이 가도 의기투합한 나혜석관련 행사 모습은 없었다. 유 회장은 이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지역구 의원과 시장 등 그들이 미웠다.

‘이혼녀’ 꼬리표 떼기 위해 문화부 ‘문화인물’ 만들기 노력
1995년 4월 ‘정월 나혜석기념사업회’ 발족 회장에 취임

한편에서 괘씸하기도 했다. 유 회장은 “도대체 이들이 발을 빼는 이유가 뭔가?” 하고 지내면서 그 연유를 알기까지는 여러해가 지나야 했다. 바로 났다. 나혜석에게 붙은 ‘이혼녀’라는 사실이 그들의 접근을 막은 것이다. 이때 주변에서는 그들에게 “이혼녀’인 나혜석과 가까이 하면 표 떨어진다”라고 말하면서 옮기기조차 민망한 말들이 쏟아졌다.

이때 유 회장은 “과연 그런 사유로 나혜석이 수원에서 잊혀져야 할 인물인가? 나혜석은 선각자요. 지성인 100명중에 1명으로 정말로 남자못지않은 훌륭한 수원이 낳은 딸인데....”라고 생각한 유 회장은 더욱 더 나혜석에 대한 공부를 했고 나름대로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부정적인 말들보다 선각자적인 언행이 더 많았던 나헤석을 알게 됐다.

1990년 이어령 교수가 초대 문화부장관이 되면서 시작한 매년 ‘이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하는 것을 알게 된 유 회장은 “정부가 나혜석을 ‘문화인물’로 선정하면 나혜석을 비하하는 참새들의 지껄임은 쑥 들어가지않겠느냐?”는 집념에 착안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혜석을 기리는 ‘나혜석기념사업회’가 구성되고 이런 기념사업회를 통해 나혜석을 문화인물로 선정되도록 추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995년 4월 유 회장의 끈질긴 노력으로 ‘정월’ 나혜석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회장은 당시 적합한 인물이 없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그가 회장이 됐다. 그해 10월경 유 회장은 나름대로 나혜석에 대한 자료를 정리한 공적서를 만들어 1996년 나혜석 탄생 100주년에 맞춰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해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그 후 회신이 왔다. 그런데 독립신문과 관련해 이미 서재필 박사를 선정했다는 것과 정월 나혜석도 문화인물이 될수있다는 짧은 정중한 회신이었다.

이에 유 회장은 100주년탄신에 맞춘 문화인물은 놓쳤지만 101주년이 되는 1997년엔 0순위가 되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가졌다. 그러나 1997년이 지나고 1998년이 지나도 그의 바람은 수포가 됐다. 요즘 흔한 말로 패싱이 된 것이다.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 전후로 신문·방송 인터뷰 쇄도
2000년 2월 ‘문화인물’로 나혜석 선정에 큰 보람 느껴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이었다. 유 회장은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학문적인 자료가 있어야 겠다고 마음 먹고 철저한 준비를 한 후 1999년 4월 28일 그의 탄생일에 제1회 그리고 그해 12월 10일 서거일에 맞춰 제2회 학술대회를 개최한 후 관련자료를 첨부해 정부에 제공했다.

이 두 차레의 심포지엄을 위해 유 회장은 농대 선후배를 통해 분야별 발제자들을 찾았고, 또한 유 회장 스스로가 학회 및 학술 활동을 많이 했기에 인맥을 동원하며 나혜석이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 등 각 분야에 대한 발표를 할 수 있는 남녀를 불문, 통합해서 각 분야별 주제를 주고 임무를 맡게 해 그야말로 성공적인 행사를 치뤘다. 이 행사에서 당시 ‘나의문화답사기’로 유명한 동생뻘이 되는 유홍준 교수가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을 해 주기로 약속을 받아낸 후 예고기사로 이를 신문에 알리자 전국의 여성들이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유 회장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됐고 또 희망을 갖게 됐다.

이때 심포지엄 행사전 미리 발표문을 달라는 아우성이 빗발쳤고 당시 한국일보는 전면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는 1/2 반절의 기사를 실었다. 이런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유 회장은 흥분을 했고 또 박경재 변호사와도 인터뷰를 했으며 TV에서도 출연요청이 쇄도를 했다. 이때 이러한 방송의 도움으로 유 회장은 나혜석의 아들인 김진 교수, 그리고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김건도 알게됐다. 이러한 홍보로 심포지엄 행사는 수원예술문화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추모행사를 곁들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유 회장은 서울대총동창회 수원지부장이 되면서 문화부장관에 신낙균이 되고 이태섭 의원이 수원 장안구 지역을 맡게되자 이들 두 명에게 나혜석을 문화인물로 선정해 줄 것을 부탁하자 적극 호응해 주면서 기타 문화계 인사들의 성원과 협조, 지지를 얻어 마침내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이 되고 그해 1월부터 2월까지 2개월간 ‘나혜석의 생애와 그림전’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정부지원을 받아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때를 회상하는 유 회장은 “당시 전국에서 나혜석의 그림을 소장하는 개인이 1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절대 신분을 밝히지 말라고 하기에 그 이유를 알아보니 신분을 밝히면 도둑이 그림을 훔쳐가기 때문에 비밀로 해 달라고 했다”

‘예술의전당’에서 2개월간 ‘나혜석의 생애와 그림전’ 성황
나혜석사업으로 1999년 한국유명인사 99인에 선정되기도

그는 또 “이후 정부에서는 수원시에 ‘나혜석 문화의 거리’ 조성비로 5천만원을 지원해 현재의 ‘나혜석 거리’가 조성이 되고, 현대 여인상인 정월 나혜석의 조각상도 설치가 됐다”고 말했다.
남성인 유 회장이 여성인 나혜석을 위해 이토록 끈질긴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전국여성단체연합회는 1999년 사회 각 분야에서 훌륭한 일을 한 유명인 99인을 선정하면서 무투표로 유홍준 회장을 선정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유 회장은 “나혜석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나혜석을 세상에 알린 공로인 것 같다”면서 “중국은 義, 일본은 忠, 한국은 孝로 상징이 되고 있는데 , 수원은 정조대왕의 개혁과 나혜석의 선각자 정신이 합쳐진 도시로 ‘개혁의 도시’로 불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 회장은 “나혜석이 서울 진명여고를 졸업했기에 진명여고측은 나혜석을 가장 자랑스러운 동문 대표인물로 선정해 해마다 행사를 하고 있는데 학교측은 나를 행사때마다 초청하고 있으며, 오는 28일 서울 인사동에서 나혜석 미술대회가 있으며, 문화인물 선정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이 올해로 22회째 개최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부인 이해숙(73)여사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고있는 유동준 회장은 “취미가 독서, 친교이며, (사)한국단미사료협회 30년근무를 끝으로 2010년에 퇴직, 그후 농업분야 전문가로 한·칠레 FTA에 참여를 했고, 현재는 개헌, 농산물가격, 조경진흥, 재생에너지 분야와 지역사랑상품전, 지방분권개최 등에 대한 각종 토론회 참여로 항상 바쁘게 소일 하고 있다”면서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기에 정의롭게 살자가 나의 좌우명”이라면서 “저의 증조부인 유기환 할아버지가 구한말에 법부, 군부, 외부 대신을 지낸분으로 항상 저는 그 분의 증손자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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