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국가가 바둑정책 집중해야 할 때”

【수원=서울뉴스통신】 대담=김인종 경기남부취재본부장 / 글·사진=류재복 대기자 조웅호 수원바둑협회 회장은 새로 지은 현재의 건물에서  ‘수원바둑협회’를 창립해 전국적인 행사를 치르는 등 바둑문화를 확장하는 데 앞장서 왔다. 

뿐만 아니라 건물 2층 전체를 시민들의 휴식처로 꾸며 누구든지 와서 편안하게 한담을 나누며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조회장이 내놓은 2층의 문화공간은 바둑애호가를 비롯해 대화가 필요한 인근 상인들에게는 사랑방이 되었다. 

올해 40년째로  수원시 관내의 어려운 이웃과 단체들에게 소리 소문 없이 도움을 주고 있는 조웅호 수원바둑협회 회장을 30일 협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수원바둑협회는 어떻게해서 창립이 됐나?
▶나는 대한체육회에서 오랫동안 잔뼈가 굵었다. 그러다가 건강상으로 퇴직을 하고 좀 쉬려했는데 다시 생활체육회 경기도지회장을 맡게 됐다. 생활체육회는 당시 6공의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체육부장관이 전국적으로 만든 조직적 단체인데 사실 말이 많았다. 당시 이재창 경기지사도 나에게 생활체육회 도지부 업무를 좀 봐달라고 해서 도지부장과 시지부장을 겸해 12년간 일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과 같이 나는 상인정신이 있었기에 공짜가 없이 피땀 흘리면서 내가 벌어 내가 썼다. 일체의 운영비와 판공비 등 모두를 내 사비로 썼다. 그러던중 2006년도에 수원에서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가 열리면서 도지사, 시장등이 ‘수원바둑협회’를 만들고 회장을 맡으라는 권유에 내가 사비로 수원바둑협회를 창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6년 세계아마추어선수권바둑대회 수원대회는 잘 치루었나?
▶당시 세계 70개국가에서 바둑인들이 참여를 해 성공적인 대회를 치루었으며, 이를 계기로 우리 수원에서 그후 프로기사 14명이 탄생을 했고 협회도 발전을 해 왔으며, 현재 이사가 20여명, 회원은 12000명이 됐다. 지난해 2017년에는 전국 프로 4명중 2명이 우리 수원협회에서 탄생이 됐고 전국 바둑계에서도 우리 수원협회를 가장 부러워하는 협회로 보고 있다. 또한 모든면에 전국에서 1등을 하고 있다. 이는 프로는 프로대로 도움이 되고 아마추어는 아마추어대로 호흡을 맞춰 협회에 도움을 주면서 발전과 단합이 돼 왔기에 전국 최고의 바둑협회가 됐다고 자부한다.

-그간 중요한 대회와 대회중에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면?
▶매년 전국대회에 참여하는 등 작년까지 12회 참가를 했고, 한국에서도 전국적으로 열리는 가장 큰 대회와 각종 대회에 수없이 참가를 했다. 회원들이 많다보니 참가자 숫자도 우리협회가 역시 최고다. 1년에 약 5~6회 정도 참가를 하면서 많은 상도 탔다. 그리고 매년 전국에서 모이다 보니 얼굴들도 모두가 알게 돼 자주 만나면서 끈끈한 우정도 맺어 왔다.
5년전 유럽에서 세계대회가 열려 회원들 16명을 데리고 참가를 했었는데 네델란드의 물가가 너무 비쌌다. 점심 한끼값이 무려 10만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라면 등을 준비해 행사에 참여했는데, 그때 그곳에서 수원대회때 우리를 보았던 네델란드 바둑계 인사들이 알아보고 도움을 주어서 행사를 잘 치루고 귀국을 했다. 또 기념품인 T샤쓰까지 주어 좋은 인연을 맺어 현재까지도 그 정을 이어오고 있다.

-바둑은 태권도와 함께 세계정상에서 우뚝 선 종목이다. 이에 대한 감회는?
▶우리 한국사람들은 재주가 참 많다. 바둑은 두뇌싸움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국가가 전폭적인 지지를 하지 않고 있다. 이제는 국가가 신경을 써야 한다. 도나 시에서도 저극적인 후원을 해서 세계적인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 해마다 전국에는 각 지역의 문화행사를 많이 하고 있지만 대개가 소모성 행사다. 그러나 바둑대회 행사는 장래 희망이 보이는 싹이 있는 행사다.
또한 바둑인구도 적지 않다. 기초실력들이 좋기에 노력만 하면 세계대회를 석권할 수가 있다. 우리는 특히 숙적 일본의 바둑계를 제압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요즘 바둑인구를 양성시키면서 불같이 일어나고 있다. 경계를 해야 할 상대다. 이에 정부에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전쟁에서 총칼없이는 이길 수가 없다. 현재 한국에는 약 3000여명의 우수한 인재들이 있다. 시도지사들은 재임중에 겉치레 행사만 하는것을 보아왔는데 이제는 잘할 수 있는, 알차고 뼈대가 있고 싹수가 있는 행사를 해야 한다고 본다.

-최근 ‘바둑진흥법’이 탄생됐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전통과 역사를 가진 스포츠 종목 중 한국바둑은 세계화에 성공한 보기 드문 사례다. 태권도와 함께 세계에서 한국이 최정상을 오래도록 지킨 종목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온라인게임 등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상대적으로 바둑 인구가 급속히 줄고 바둑대회도 급감하는 등 저변이 위축되며 위기를 맞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 바둑이 갖는 독특한 가치를 볼 때 바둑진흥에 힘써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돼 왔기에 이런 법이 탄생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법으로 인해 한국바둑은 성장할 기반을 마련했고 저변 확대와 질적 향상은 물론 그 교육적 가치를 제고할 수 있게 됐다. 향후 한국바둑이 세계를 선도하는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한국바둑의 진흥과 지원을 위한 근거가 확실해진 만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기원 등 관련단체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은 이제 한국바둑 부흥의 토대를 만드는데 앞장을 서야 할 때라고 본다.
바둑은 건전한 여가로서 가치뿐만 아니라 교육적 효과도 크다. 실제 서울대 정신의학과 연구결과에도 바둑이 깊은 통찰력을 갖도록 하고 직관적 판단력을 높이는 것으로 입증됐다. 최근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으로 바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이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바둑을 체계적으로 육성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와같은 바둑진흥법이 생긴 것으로 본다.

-수원시청과 수원지검에서 봉사활동을 오랫동안 했다고 들었는데?
▶수원시청에서 약 10여년간을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까지 위민봉사관으로 일을 했다. 주로 소외계층을 돕는데 전력을 다했다. 주례도 1150쌍을 섰다. 그래서 수원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수원검찰청에서도 역시 옴부즈맨으로 열심히 10여년간 봉사를 했다. 주로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나를 보고 변호사보다도 더 낫다는 평을 해주기도 했다.
언젠가 어느 부동산소개를 다루는 사무실에서 한 부동산 소유자의 땅을 팔아주면 50%를 받기로 했다는 가짜 약정서를 만들어 거액의 수수료를 편취하려 한 사건도 내가 해결을 해 피해를 막았다. 가짜로 인감증명을 만들고 당시 사용했던 인주, 종이, 잉크, 날자 등을 내가 발견하면서 가짜임을 밝혀 사기를 당할 것을 막아준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 일을 다시 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 지역에서 너무도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볼 때도 많은데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

-봉사활동 중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면?
▶시청과 검찰청에서 오랫동안 봉사를 했지만 사실 이런일은 나이가 먹은 사람들이 해야 잘 할수 있다는 것을 경험상 알았다. 인기탤런트인 나문희씨와 그의 어머니 허윤옥씨를 만나게 해 준 일은 정말 잊을수가 없다. 수원여고를 나온 나문희 이모가 중국 하얼빈에서 내게 편지를 보내오면서 시작된 일로 결국은 나의 노력으로 그들 모녀를 상면케 해주었다.
-평양조씨 중앙종친회장도 맡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정조의 무력기반이었던 무의공 조심태 장군의 후예로 현재 평양조씨 중앙종친회장을 맡고 있다. 이는 나의 아버지(조재훈)의 영향이 컸다. 나의 아버지는 86년전에 현재의 수원 남문시장에 비단을 취급하는 광덕상회를 열었다. ‘광덕(넓을 광 廣·큰 덕 德)상회’라는 이름으로 상호를 지은 것은 아버지의 장사에 대한 철학이 있었기에 이익만 생각하고 장사를 하는 상인이 아니라 정당한 부를 쌓아 넓게 덕을 베풀 수 있을 거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남문시장과 영동시장 그리고 팔달문 시장의 원조인 화성 성외시장을 건설한 실용정신의 소유자 화성유수 조심태 장군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항상 아버지께서는 “자식들보다도 조상을 더 잘 받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종친회에 26억을 기부한 일도 있다. 결국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전국 중앙종친회장을 맡아 일을 하고 있지만 항상 보람을 느끼면서 일하고 있다. 즉 “살아있는 문중들과 일가들이 잘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할말이 더 있다면?
▶중국 바둑협회와 교류를 하고싶다. 이왕이면 중국 동북3성중의 하나인 길림성 연변쪽과 하고 싶다. 나의 모교인 수원고교가 길림성 연변 안도현제2중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었다고 하기에 그쪽 지방과 하고 싶다. 그곳 학교 선생들이 수원고교인 모교를 찾아왔을때 나는 이들과 제주도에서 2박3일간 여행을 한적도 있으며, 지난해에는 결혼후 54년을 함께 살아온 부인을 먼저 보내고, 현재는 혼자 지내고 있지만 아무런 불편이 없다. 1남3녀의 자식들도 모두가 결혼해 잘살고 있다. 나는 앞으로 30년간은 더 살아야 하기에 매일 매일 건강을 위해 술도 적당히 마시고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조웅호 회장은 1960년대 초, 가게를 물려받아 한동안 장사에 몰두했다가 1971년도에 가게를 접고 대한체육회에 입사, 1978년도까지 근무했다. 퇴사 후 그는 다시 남문패션1번가로 지명이 바뀐 시장으로 돌아와 건물을 새로 지어 올렸다.

 그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장사를 했고 터를 잡은 만큼, 그에게 이 터는 고향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오늘도 ‘廣德상회’의 아들답게 또 정조시대 유상(柳商)의 후예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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