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도 시대가 변화하는 만큼 발빠르게 준비 대처해야죠”

▲ 이정구 수원역전지하도상가 상인회장이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잡았다.

【수원=서울뉴스통신】 대담=김인종 편집위원장/ 글=김동초 대기자 =

숙부 권유로 수원역지하도상가시장과 인연
97년경 액세서리·팬시 등 최고의 매출 올려
핸드폰 매장 호황땐 상가의 70%가 취급
대형유통점에 대응 위해 상가 리모델링도
지금은 새로운 아이템 구상과 변화 필요해

수원역 맞은편 도청방향으로 이어진 매산로테마거리 상점가시장이 위치한 젊음의 거리에 주차를 시키고 역전지하도상가로 내려가는 길이 평일의 오후임에도 불구하구 살짝 분주하다.

고등학생을 갓 벗어난 아직은 앳된 스타일처럼 보이는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상가를 담소로 수놓으며 오가는 행렬이 점점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방학을 했거나 졸업을 앞둔 청춘들의 ‘설레임’이 한껏 묻어 나오는 풍경이 정겹게 펼쳐지고 있었다.

활발한 거리를 지나쳐 수원역 11출구로 내려가니 정면에는 휴대폰 상가가 다양한 신제품들을 진열해 놓고 고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오른 쪽에 자리한 상인회사무실로 들어서니 오늘 인터뷰 약속을 한 수원역전지하도상가시장 이정구 회장이 혈색 좋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준다.
“인상과 인물이 참으로 좋다” 한 50대 초반 쯤으로 보이는 스타일인데 인터뷰초입에 출생연도를 물으니 61생이란다. 우리나이로 60이다. ‘환갑‘이다.

필자도 한 때는 ‘동안’이란 소리도 많이 듣고 나보다 너 댓살 어린 친구들이 면식이 약한 시절, 한때는 동년배로 대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좀 심했었던 적이 있어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이정구 상인회장은 첫 인상이 후덕하다. 호남 형에 너그러운 인상이 사내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스타일이다. 이정구 회장은 61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을 했다고 한다.

익산은 평야가 넓은 ‘곡창지대’로 사람들이 밀집해 사는 관계로 사람들 사이의 부대낌이 잦았고 그래서 간간히 다툼으로 인해 거칠은 모습들도 자주 연출되었던 곳이라고 했다. 자신도 2녀 3남 중 맏이로 장손인 아버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어린 시절 공부보다는 바깥세상에 관심이 많았던 관계로 ‘질풍노도’시기의 한 참 때는 익산 시내가 좁았다고 한다. 그래서 64년생인 바로 아래 동생이 장남역할을 하며 고생이 심했었다며 미안함을 표하기도 했다.

이정구 회장은 익산에서 ‘춘포초’를 나와 익산 원광 중·고를 거쳐 전주에 있는 전주공업전문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교육열이 높았던 관계로 누님은 교대를 나와 교편을 잡으시고 동생들도 전북대를 나와 나름, 학자적인 분위기도 풍기는 집안으로 보였다.

아버님이 농사를 지으시며 자식들을 모두 대학까지 교육시키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올 곧은 성품의 인물이셨을 거란 생각도 들며 마음고생 또한 적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정구 회장은 대학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에서 ‘5·18 민주화 항쟁’이 발생, 시국이 불안정해 수업분위기가 별로 안 좋았고 자신은 인문계고등학교를 졸업한 관계로 수업자체가 어려웠다고 했다. 그래서 외곽으로 돌다가 졸업시기를 놓쳐 한 학기를 더 다녔다며 겸연쩍은 미소로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군 입대를 했고 포천에 있는 5군단에서 전자공학 출신의 병과를 살려 ‘통신병’으로 국가에 충성하며 85년도에 무사히 제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인의 소개로 지금도 운영이 되고 있는 기업으로 수원 망포동에 소재한 ‘덕성화학’에 입사, 드디어 수원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수원이나 익산이나 도시의 수준이 별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외지인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 한때는 마음고생도 했었다고 했다.

수원 망포동에서 자취를 하며 직장생활 3년차인 88년 5월 5일에는 지금의 아내와 백년가약을 맺었다며 당시를 회상하는 모습에선 그리움 같은 것이 묻어나오기도 했다. 아내는 당시 같은 교회를 다니던 지인분이 중매를 해주셨고 같은 직장을 다녔기에 좀 더 친근감을 느꼈다고 했다.

아내의 수더분하고 원만한 성격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던 것이 제일 큰 결혼의 이유였다고 했다. 당시는 노태우 정부시기로 88올림픽 준비로 전국이 떠들썩한 때이기도 했다.

원래는 가을에 식을 올릴 계획이었으나 아버님의 재촉으로 서둘러 5월 5일, 어린이 날인 늦봄에 식을 올렸다고 했다.

신혼살림은 세류초 앞에서 아버님이 얻어주신 전세방에서 시작했는데 그해 겨울 12월에 건강하시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정말 큰 충격과 마음고생이 심했었다고 술회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님이 결혼을 서두르신 이유가 본능적인 직감으로 무언가 있지 않을 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술·담배도 전혀 안하시던 정말 건장하시고 체력이 좋으셨던 분이라 아직도 돌아가신 이유가 무언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단지 돌아가시기 전날 자리에서 주무실 때 코골이가 다른 날보다 워낙 심했었다는 가족들의 말에 조심스레 ‘급 호흡정지’를 점치기도 했다.

이정구 상인회장은 결혼에 이어 아버님의 급작스런 작고가 연이어 발생하던 중, 김제에 살고 있던 친구가 ‘사출기 사업’을 함께 해보자는 권유를 했고 아버님 급작스런 작고로 늘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던 터라 이참에 어머님만은 돌봐드려야 겠다는 생각으로 낙향, 3년 동안 김제에서 친구와 사출기사업을 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방이라는 사업성의 한계가 있었고 대기업들을 상대로 개인인 소상공인들이 이익을 남긴다는 게 정말 어려웠었다고 토로했다.

이렇게 사업부진이 계속 될 즈음, 수원역전지하도상가에서 옷가게를 하시던 작은 아버님이 수원역전지하상가에서 장사를 해보라는 제의를 받아들여 97년, 다시 수원으로 올라와 역전지하도상가에서 ‘악세사리와 펜시’ 등을 취급하는 점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97년은 국가 부도직전으로 외환위기인 ‘IMF’가 곧 닥쳤지만 그건 남의 나라 이야기 인 듯 역전지하도 상가는 ‘경기호황’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는 전국에 ‘e-mart매장’이 ‘서울창동’ 한 군데 밖에 없었던 까닭으로 수원역전지하상가의 ‘악세사리나 펜시’를 비롯한 거의 모든 업종의 사업경쟁력이 최고였다고 했다. 지금의 ‘다이소’ 스타일의 매장 구성으로 엄청난 매출을 올렸던 시기라고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때부터 대기업 유통들이 지자체 도시들의 요지에 최신시설을 갖춰 대규모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수원역에도 A·K 백화점이 들어서 지역 상권을 위협하더니 이명박 정부 때는 롯데 몰까지 입점, 최악의 상황이 절정에 이르며 상권이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는 ‘재래시장 특별법’이나 ‘유통산업 발전법’ 등이 없던 시기로 기존의 지역 상권들이 거의 궤멸되다 시피 해 살길을 찾기 위해선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했다고 했다. 그때 하늘의 선물처럼 등장한 것이 ‘핸드폰’으로 매장크기에 별로 구애를 받지 않는 상품인 까닭에 BOX형식의 역전지하상가 점포들이 활로를 찾았고 상가의 70%가 핸드폰을 취급 할 정도였다고 했다.

당시 SK나 KT 등 대형통신업체에서 각종 지원이 끊이지 않았고 지방에서 수원역전지하상가시장으로 물건을 구매하러 왔으며 심지어 부산에서도 기차를 타고 수원역으로 올라올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곧이어 시행된 ‘단통법’으로 전국적인 ‘가격평준화시대’를 맞이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성장 동력’이 절실해 졌다고 했다.

이정구 상인회장은 2013년부터 상인회장을 맡아서 상가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2015년 10월에는 인근 AK플라자나 롯데 쇼핑몰에 비해 모든 시설이 열악해 매출자체가 지속적으로 저조하던 차, 그 대응책으로 37억 원의 자체예산을 적립, 상가전체의 ‘리모델링’을 실시했다고 했다.

당시 상인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갈려 상당히 애를 먹었다며 7개월간의 공사 끝에 2016년 5월, 새롭게 단장된 모습을 고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어 한시름 놓기도 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 후 3년 정도 리모델링의 효과를 보며 매출이 살아났지만 다시 새로운 아이템의 구상과 마련이 시급해졌다고 했다.

리모델링 실시를 위해 상인들 사이에서 많은 갈등과 대립이 발생 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접촉하며 힘을 한데 모으는 과정에서 진심과 능력을 인정받아 아직까지 역전지하상가시장의 상인회장직을 맡고 있다며 상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이정구 상인회장은 상인회장직을 7년째 수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더 상인들과의 긴밀하고 원활한 소통을 통해 상가발전을 모색할 것이라며 시대가 변하는 만큼 늘 그에 따른 준비와 발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고 했다.

수원 뿐 아니라 전국의 경기가 불황을 타고 있는 현실에서 이정구 상인회장은 지역상권활성화를 위해 수원시가 실시하는 ‘도시재생’사업에 수원역세권 4개시장과 함께 사업을 신청, 예산을 받아내며 재도약의 발판을 힘차게 닦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인터뷰 말미 가족구성과 인생의 좌우명을 묻는 필자의 질문엔 나름 진지한 모습으로 답변을 했다. 현재 두 아들(32세, 28세)이 있으며 장남은 삼성전자에 근무 중이고 둘째는 역전지하상가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펜시와 악세사리’ 등의 가업을 이어서 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후반부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나름의 보람과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을 문득 보이기도 했다.

이어 ‘좌우명’은 “信義(신의)를 지키자”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신의’가 기본이 되지 않으면 근본이 약하고, 언젠가는 아픈 결말을 맞이한다고 했다.

‘이익과 손해’를 떠나서 서로간의 믿음이 존재하면 인간관계는 늘 따뜻하고 정겨울 것이라고 했다. 팍팍하고 각박해져 가는 현실에서 그나마 사람들이 의지하고 서로 도울 수 있는 것은 ‘信義(신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라고 했다.

이정구 역전지하상가시장 상인회장은 좋은 혈색과 인물만큼이나 인간성도 넉넉함을 느끼게 해주는 인물이었다. 차가워지는 오후의 겨울 날씨 속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정을 느끼며 인터뷰를 마쳤다.

수원역전지하상가가 하나 둘 씩 생동감을 찾아가는 시점이며 시계바늘은 거리의 불빛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나는 오후 5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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