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대한민국 앵커맨 봉두완의 '신앙고백' (5)
아흔 넘은 소년 <1>
2012-04-05 서울뉴스통신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염원만 있을 뿐이었다. 헐벗고 굶주리고 찢어진 겨레의 아픔을 달래어,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고 충만한 하느님의 은총을 맛보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부님은 항상 웃는 얼굴로 우리를 대했다.
그것은 어쩌면 이냐시오 성인의 모습이었다. 예수회의 창립자인 이냐시오 성인은 일찍이 스페인군에 입대하여 전투에 참전했다가 성인들의 생애에 관한 서적을 읽고 그리스도의 군대가 될 것을 결심했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상처가 회복된 후 몬세라트에서 참회, 만레사에서 기도와 금욕생활을 했는데 거기서 쓴 영성 수련은 신비 체험을 통해 얻은 그의 영성적 통찰력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업적은 예수회를 통해 교회를 안으로부터 개혁시킨 데 있으며 예수회는 교육사업과 성서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를 회복시키는데 기여했다.
가만히 되돌아보면 50년 전에 철없이 지내던 우리가 그때 영세를 주신 노사제와 어태껏 변함없이 지내왔다는 것도 하나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진성만 신부님은 결국 94세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로부터 영세를 받은 우리가 거의 50년을 한결같이 신부님을 모셨던 일은 하나의 자랑거리로 남아있다.
하도 돌아다니는 데가 많은 사제였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 신부님을 위해 자동차 한 대를 사드렸다. 하지만 신부님께선 워낙 과속으로 달리기를 좋아했기에 툭하면 교통순경에게 걸리곤 했다. 그런 날이면 신부님은 항상 "나 오늘 또 걸렸어요. 정신없이 막 달렸더니 속도위반으로 그만"이라고 아이처럼 웃으며 말씀하셨다. 로만 칼라를 한 할아버지 신부님을 보고 교통순경은 "저희 집도 가톨릭인데요. 신부님, 운전 좀 살살하세요. 이렇게 중요하신 분이....."하면서 친절하게 방면하기 일쑤였다.
거제도 출신인 신부님은 일본에서 23년간 살다 귀국했기 때문에 일식을 참 좋아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차례로 밥값을 내고 따로 봉투를 만들어 드리곤 했다. 주로 <조선일보> 빌딩에 있는 고급 일식집 '사까에'에서 만나곤 했었다. 하지만 좀 부담도 되고 해서 나중엔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열해'라는 일식집에서 만났다. 값도 좀 싸고 교통도 편했다. 생선회 두 접시를 시키면 으레 한 접시는 신부님 앞으로 당겨놓았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수도원 '말씀의 집'에 칩거하면서 밤낮 똑같은 메뉴만 드시다가 생선회만 보면 정신없이 젓가락을 움직이는 노 사제를 보면서 우리는 행복감에 젖어들곤 했다.
지금은 우리 성당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 내 막내 녀석이 어렸을적에 진 신부님과 회식 자리에 합석한 적이 있었다. 일식집에서 저녁을 먹는 자리였는데 미리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진 신부님이 마치 표범처럼 달려들어 생선회부터 입에 집어넣는 걸 보고는 아들 녀석은 휘둥그레 놀라는 것이었다.
"아빠, 신부님이 '성부와 성자와...'도 안 하고 잡수셨어요!"
성당에서 학생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 가톨릭은 언제나 식사 전에 십자가 성호를 크게 긋고 "주여,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에 강복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하도록 되어 있는데 노 사제가 그걸 안하고 음식을 드셨으니 그 녀석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우리 영세 동기들은 부부 동반을 해서 신부님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동안 밀린 얘기를 주고받으며 신나게 떠들어 대곤 했었다. 신부님이 점차 고령으로 이런저런 탈이 생기게 되자 서울대학 병원장인 이영우 박사는 진맥도 하고 처방도 해드리면서 신부님의 건강을 챙겼다. 신부님은 당뇨 걱정을 많이 하시면서 나이를 먹을수록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했다. 그래서 뉴욕에서 정신과 병원을 하는 이철 박사가 보청기를 마련해 드렸다. 때로 소화가 잘 안되고 혈압이 오르고 당뇨도 심해서 힘들다고 했다.
"신부님, 지금 같아선 그냥 괜찮은거 같아요. 식사 후에 꼭 산부하시고....."
이영우 박사가 대충 진단해보고는 말했다.
"난 산보 많이 해요. 그리고 매일 아침 혈당도 꼭 재고......"
신부님은 건강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신부님, 제가 뉴욕의 이철에게 혈당기 사서 보내라고 할게요."
"그리고 입천장에 붙지 않는 껌 좀 사 보내라 카고. 내가 의치라서....."
신부님은 꼭 어린아이와 같은 주문을 빼놓지 않았다. 신부님은 본래 포도주 반 잔만 드셔도 얼굴이 빨갛게 된다. 우리도 이제는 앉은자리에서 뚝딱 소주 몇 병씩 비우던 옛날처럼 마시는게 아니라 백포도주 서너 병으로 만족한다.
내가 앵커맨 때 간 박사로 이름난 서울대 의대 김정영 교수와 이영우 박사 틈에서 한잔할 적에는 대충 소주 두 병을 마셨다. 그러고 나서는 눈치것 앉아 있다가 중간에 도망가기 일쑤였다. 신부님을 앉혀놓고 우리끼리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떠들어 대면 신부님은 드고 계시는지 가끔 입가에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씀 없이 앞에 놓인 생선회만 말끔히 해치우는 대식가였다. 그러면서도 노사제는 꼭 우리들의 가정과 자녀들의 안부를 잊지 않고 챙겼다.
"화식이는 잘 있어요? 이냐시오 색시의 본명을 그때 내가 잘못 말한 것 같아요. 글라라가 아니라 카타리나인데..... 아기는 미국에서 영세했어요?"
미국에서 신문 기자 생활을 하는 우리집 큰 아들 화식은 진성만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았고, 또 성 라자로 마을에서 결혼식을 할 때도 축하객 30명만 모시고 진성만 신부님을 주례로 혼배성사를 했다. 물론 김화태 원장 신부와도 함께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우리 신부님인 셈이다.
1965년 9월 24일. 화식이가 태어났을 때 보내드린 사진을 놓고 줄곧 기도해주신 훌륭한 노 사제. 정말 이렇게 성인 같은 신부님이 세상에 또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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