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기 칼럼] 노 프라블럼

2024-12-23     김운기 시인/수원문인협회회장
김운기 시인/수원문인협회회장

20여 년 전 처음 인도를 여행했을 때 사이클 릭샤(자전거로 끄는 인력거)에 타고 가다가 복잡한 델리 거리 한가운데에서 나를 태우고 가던 자전거 페달이 부러진 적이 있었다.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는데도 릭샤 꾼은 ‘노 프라블럼’을 연발하며 나를 태운 릭샤를 끌고 3km 정도나 더 남은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것이었다. 비쩍 마른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끌고 가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괜찮으냐고 물으면 연신 웃으며 ‘노 프라블럼’을 외쳐 대는 것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는 소년의 ‘노 프라블럼’이라는 말만 믿고 숙소에 제공하는 병에 담긴 물을 마시고 며칠 동안 설사하며 탈진했던 때에도 ‘노 프러블럼’을 믿었다. ‘노 프라블럼’의 의미가 ‘문제없다’ 또는 ‘별 탈 없다’쯤으로 알고 있기에 처음엔 정말 괜찮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프라블럼이란 말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로 인도를 몇 차례 더 여행하면서였다. 인도사람들이 그토록 그 말을 많이 쓰는 이유는 그냥 문제없다 또는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일은 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니 인간이 노심하고 바둥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세상사 모든 것은 노 프라블럼 아니냐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필자가 그런 철학적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지 인도사람 대부분이 그런 깊은 의미로 사용할 리는 없다. 그들은 모르고, 귀찮고 무책임해서 그저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인데 많은 낯선 사람들에겐 빅 프라블럼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연착한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을 역무원이 잘못 알려주어 기차를 놓쳐 팔팔 뛰고 있는데도 옆에서 역무원은 느긋하게 노 프라블럼을 연발하며 웃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시라.

그러나 인도에서뿐 아니라 나이 들면서 살다 보니 이 말이 얼마나 건강에 좋은지 알게 되었다. 무슨 어려운 일에 봉착하게 되면 노 프라블럼, 시시비비 따지다가도 머리가 아프면 노 프라블럼, 하는 일이 꼬이고 잘 안되어도 노 프라블럼. 나라 안의 잘못만 아니라 이제는 먼 나라의 문제가 내 밥상을 흔들어 놓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어찌 프라블럼의 정신만 갖고 살 수 있겠으며 무한 경쟁의 글로벌 사회 속에서 국가나 개개인인들 힘든 굴곡이 왜 없겠는가.

아무리 힘든 상황으로 처하더라도 믿는 것이 있게 되거나 희망이 있다면 내일이 보이고 절망하지 않게 된다. 노 프라블럼이 갖는 긍정의 힘인 것이다. 시경(詩經)에 주(周)나라 여왕(勵王)의 학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탄식이 나온다. “우리가 때를 잘못 택해서 태어난 게 잘못이다. 이 때문에 하늘의 노여움을 오늘에 우리가 받는 것이다.”라며 시대의 불행을 자기네 탓으로 돌리는 구절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때를 잘못 택해서 태어난 것인가? 아니다. 25년 전 가혹했던 외환위기를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이를 겪고 살아남아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진입하고 세계가 주목하는 K-문화를 창조하는 우리에게 오늘의 겨울은 불안하고 추운 것이 사실이지만 노 프라블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힘든 고비이며 사회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요소는 가지고 있으나 성숙한 국민들은 이에 동요하지 않는다. 달러환율이 조금 올랐다 해서 위급할 일도 아니다. 세계 신용 평가회사들이 한국의 신용도 변경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외신은 전한다. 그만큼 우리의 저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노 프라블럼이다.

올해도 예외 없이 구세군 자선냄비 시종식을 열고 역대급 많은 성금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해마다 성금 대부분이 소액중심이었고 일반 소시민들의 마음이었으니 어둠 속에서 여명을 보는 듯하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평생 먹고도 남을 양식을 곡간에 쌓아두고 무소유를 외치는 일부 위선자들에게 이는 진선미(眞善美)의 경전(經典)이 되었으면 한다.

필자가 맡아 활동하는 문인 단체에서도 올해에 많은 일을 수행하면서 구성원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았다. 다사다행(多事多幸)한 한 해였음을 회고한다.

너와 나의 벽을 허물고 맞이할 을사년 새해, 어떠한 어려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해도 우리 다 함께 어둠을 극복하는 긍정의 한 해가 되리라 믿는다. 대한민국, ‘노 프라블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