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수필/숲에서 부르는 3월의 봄꽃 노래

2025-02-24     류중권 시인

3월입니다. 아직 얼음이 남아있는 저수지를 지나온 바람이 차갑습니다. 해맑은 햇살이 눈이 부시게 쏟아져 내립니다. 운동장 가득 금빛 조각들입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 잠시 집으로 내려갔던 정인이가 언덕길을 달려 올라옵니다. 숨이 가쁩니다.

“선생님 꽃이 피었어요, 꽃이요, 제 꽃이 피었다고요.”

아, 저렇게 들뜬 걸 보니 드디어 설연화가 피었나봅니다. 아이가 흥분이 되어 큰 소리로 떠듭니다.

“다섯 송이가 폈어요, 다섯 송이요, 제가 형제바위까지 갔다 왔어요, 선생님 빨리 가요, 빨리요.”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노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칩니다.

“꽃이 폈어, 내 꽃이 폈다고!”

아이들이 달려옵니다.

“와! 좋겠다, 선생님 우리 빨리 가요.”

아이들이 긴 줄을 만들며 논둑길을 달려갑니다. 논에 거름을 내던 홍 씨 아저씨가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허리를 펴고 부릅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예요? 쟤들 왜 저리 뜁니까?”

“예, 어르신, 평안하시지요? 형제바위에 복수초가 피었나 봐요.”

“아, 벌써 꽃들이 피는가요? 복수초가 피었으면 부채골 계곡을 따라 노루귀와 바람꽃들도 지금쯤 꽃이 올라오지 않았을까요?

“예, 햇살 좋은 쪽으로 며칠 전 부터 꽃대가 올라오고 있었어요.”

“그렇지요, 에고, 저 녀석들 이제부터 아주 살판이 났네 그려, 하긴 긴 겨울 내내 눈이며 얼음 속에 갇혀 살다 봄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선생님도 바빠지시겠어요, 아이들 데리고 꽃들 찾아 헤매 실려면요.”

“예, 그러게요, 어르신, 꽃들이 피면 보시는 대로 연락 좀 주세요.”

“예, 예, 아무렴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내 보는 즉시 전화하지요.”

홍 씨 아저씨가 깔깔 웃습니다.

아이들이 조용한 마을을 그렇게 온통 소란을 펴 뒤집어 놓으며 형제바위 위로 올라갑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눈이 녹았다 얼었다하며 얼음판을 만들어놓아 미끄럽던 널찍한 바위가 며칠 동안의 봄 햇살로 바싹 말랐습니다.

와! 정말입니다. 복수초 다섯 송이가 샛노란 웃음으로 아이들을 맞아줍니다. 복수초는 설연화라는 예쁜 이름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눈 속에 피는 연꽃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이 꽃은 3월이 되기 전에 이미 꽁꽁 언 땅속에서 두꺼운 꽃 이파리들로 진한 갈색이 섞인 초록빛 꽃망울을 만들다가 햇살이 느껴지면 스스로 몸에서 열을 내어 언 땅을 조금씩 녹이기 시작합니다. 아직 겨울이 남아있는 2월의 언 땅을 두꺼운 머리로 뚫고 나오며 햇살 속에 샛노란 꽃 이파리를 펼칩니다. 마치 햇살처럼 눈이 부신 샛노란 꽃으로 숲에서 맨 먼저 핍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고는 해도 아직은 서릿발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는 겨울이 무서워 누구도 먼저 싹을 틔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움츠리고 있지만 이 꽃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정말 예뻐요.”

“하늘나라에서 금빛천사가 내려와서 웃는 것 같아요, 웃음소리가 들려요.”

“와! 정말 씩씩해요. 얼음을 뚫고 올라왔어요.”

“그래 캄캄한 땅 속에서 샛노란 꿈을 만든 후 이렇게 얼음을 녹이며 올라왔구나. 보렴, 저리 무서운 서릿발들마저도 설연화의 꿈을 꺾지 못했구나. 보렴, 꽁꽁 언 땅 속에서 겨울바람 소리를 들으며 힘들고 무섭기도 하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얼음을 녹이며 올라와 샛노란 꽃을 피워내는 설연화의 힘이 보이지 않니?”

잿빛 바위에 쏟아져 내리는 봄 햇살 조각들이 반짝입니다. 머리를 맞대고 샛노란 설연화 꽃송이를 들여다보는 아이들의 눈망울들이 반짝입니다. 아이들의 가슴에 자라고 있는 샛노란 꿈들의 반짝입니다.

복수초꽃이 필 때가 되면 골짜기를 따라 노루귀들도 따라 피기 시작합니다. 엊그제만 해도 마른 낙엽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여린 꽃망울이었는데, 오늘쯤은 분명 꽃송이를 열지 않았을까요? 눈 쌓인 얼음 밑을 흐르며 계곡물이 이제는 종달새 소리처럼 맑은 노래를 부릅니다.

형제 바위를 내려와 노루귀들이 모여살고 있는 계곡을 찾아갑니다. 산자락 작은 교회의 마당을 지나 계곡을 따라 조금 오르면 마른 낙엽이 바스락 거리는 작은 언덕 아래 노루귀들과 바람꽃들이 군락지를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노루귀나 바람꽃들은 잎이 없이 먼저 작고 여린 꽃대를 낙엽사이로 들어올리기 때문에 발을 낙엽 위에 디딜 때마다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놓아야합니다. 넘어진 고목 그루터기 옆에 보랏빛 노루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해마다 왕눈샘과 아이들이 제일 먼저 만나는 청노루귀 식구들입니다.

“와 노루귀예요! 꽃이 피었어요!”

누구랄 것 없이 아이들이 소리를 칩니다. 행여 꽃들이 낙엽 사이에 숨어있을세라 조심조심 발밑을 살피며, 천천히 다가갑니다. 노루귀 가족들이 모여 상수리나무 가지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햇살을 줍다가 우리를 보고 활짝 웃습니다. 청보랏빛 꽃잎들 속의 은빛 수술들을 흔들며 반겨줍니다. 모두들 그만 숨이 턱 막힙니다.

“선생님 여기도 피고 있어요. 분홍 꽃도 있고 하얀 꽃도 있어요.”

“여기 바람꽃들도 피었어요!”

마른 상수리나무 낙엽들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노루귀의 가늘고 여린 꽃대가 아직은 채 가시지 않은 겨울 끝 바람이 추운지 솜털을 보송보송 일으켜 세웁니다. 꽃잎을 대신하는 노루귀의 도톰한 꽃받침 8장이 마치 땅을 뚫고 올라온 청옥, 홍옥, 백옥의 보석 알갱이들처럼 봄 햇살에 반짝입니다. 노루귀는 봄이 시작되고 계곡의 물이 돌돌거리기 시작하면 이미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때는 펑펑 쏟아져 내리는 봄눈을 뚫고 꽃송이를 펼치기도 합니다. 노루귀라는 이름은 꽃이 먼저 피었다가 지면, 땅에서 둥글게 말린 잎들이 삼각형 모양으로 나오는데, 그 모양이 노루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와! 노루귀꽃들이 마치 보물처럼 반짝이는 것 같아요.”

“맞아요. 수정들처럼 반짝여요.”

“정말 그렇구나. 그래, 맞아. 산과 들은 이렇게 보석처럼 반짝이는 마음들을 갖고 있단다. 그 아름다운 마음들이 이렇게 예쁜 노루귀나 복수초 또 바람꽃으로 올라와 반짝이는 게 아닐까? 너희들도 이런 반짝임이란다. 별빛처럼 티 없이 밝은 영혼, 햇살 조각 하나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맑은 생각, 꽃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청결한 귀, 동고비가 물고 있는 금빛 햇살 조각들을 볼 수 있는 순수한 눈… 어린이들이 있어 세상은 봄의 숲속처럼 반짝이는 거란다.”

계곡의 싱그러운 물소리를 들으려는 걸까요? 햇살을 줍던 노루귀들이 앙증맞은 귀들을 세우고 고개를 돌립니다. 동고비 남매가 파득거리며 아이들 손바닥 서너 개 만큼이나 작은 웅덩이에서 파득거리며 물장구를 칩니다. 아이들의 가슴 가득 봄으로 반짝입니다. 반짝임이 노래가 됩니다. 노래를 부르며 학교로 돌아오는 길 교문 앞 텃밭에서 풀을 뽑고 계시는 교장선생님을 만납니다. 머쓱해하는 왕눈이 샘과 아이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며 까르르 웃으십니다.

“왕눈이 선생님 반이 이 좋은 날 오후, 교실에 앉아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류중권 시인

*약력

수원문인협회 회원

《한국아동문예》 아동문학상 수상

시집 『가막살 나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