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기 칼럼] 스폰서(sponsor)
자네와 나를 합쳐야 왕망천(王輞川)이 되는데(爾我合爲王輞川)/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둘이 다 허둥대네(畵飛詩墜兩翩翩)/ 돌아가는 나귀 멀어져도 아직까지는 보이는데(歸驢己遠猶堪望)/ 노을 지는 강서를 바라보며 원망하네(怊愴江西落照天)
이별의 아쉬움이 가득한 이 시는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며 지은 이별 시가 아니다.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 겸재(謙齋) 정선이 양천 현감으로 부임하기 위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그의 친구 이병연(李秉淵)이 지은 시다. 사천(槎川) 이병연은 일만 수가 넘는 진경시를 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데 겸재(謙齋)와는 같은 마을에서 자라며 동문수학한 벗이자 정선의 그림에 시를 붙여주며 그림과 시를 교류한 평생의 후원자였다. 이 두 사람은 “시에서는 이병연, 그림에서는 정선”이라고 불릴 만큼 각자 정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겸재와 사천(槎川)이 시와 그림을 교류하며 만든 서화집이 바로 유명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으로 국보 216호로 지정되어있다. 얼마 전 학계의 고증에 의하면, 진경산수화의 결정체인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사천이 말년에 병이 들자 오직 그의 쾌유를 빌며 정선은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조선전기, 안평대군도 ‘몽유도원도’를 그린 화가 안견의 후원자였다. 안평대군은 안견과 교류하며 안견의 작품을 수집하여 감상하고 탁월한 비평을 그에게 해주면서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불후의 명작인 몽유도원도를 남기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인문과 예술가들의 뒤에는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와 같은 탁월한 정치 경제의 권력자와 수백 년 대를 이어 후원을 자임해온 그 가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후광으로 찬란한 인문예술의 꽃을 피운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맞을 수 있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그에 필적할 가문으로 록펠러 가를 들 수 있다. 록펠러가(家)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재벌 가문 중 하나로, 그들의 후원 사업은 예술,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이들은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문화적 가치와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각종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록펠러 가문의 후원 덕분으로 많은 음악, 문학, 예술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다. 그들의 후원 사업은 그 대상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비단 예술뿐 아니라 학술, 스포츠, 문화 전반에 후원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다. 권력과 재력의 뒤편에서 인류의 정신적 가치와 국민 행복의 원천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보상 차원에서라도 재정적 후원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낌없는 격려와 재정적인 뒷받침으로 잘 키워낸 스타나 한류의 힘은 개인적인 영예와 부의 가치도 따르지만, 국가나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앞장서서 상승시키는 열매가 되기 때문이다.
빛과 그늘처럼, 이러한 긍정적인 후원문화가 언젠가부터 구석 사회에서는 ‘스폰서’라는 이름으로 음산하고 부정적인 독버섯처럼 등장했다. 과거 언론의 가십거리로나 등장하던 연예인들을 둘러싼 ‘스폰서’ 스캔들이 이젠 뒷전으로 물러나 있고, 권력과 개발업자 사이에는 이권 카르텔을 형성하여 수백 수십억 원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정 거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후원이라는 선한 취지가 무색하게 특정 정치권력자에게는 후원금 모금 하루 만에 한도 금액과 인원이 넘게 몰려 마감했다느니, 어떤 정치 세도가의 출판기념식에서는 책 한 권이 수백 수십만 원씩 팔렸다는 추문이 난무하는 것은 후원의 부정적 모습이다.
필자가 맡아있는 문인협회에서는 2024년 7월부터 시민을 대상으로 문학 강좌를 개설한 수원문학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문학 전반에 걸쳐 각 장르별로 12개 강좌가 있다. 수강료가 없이 교재비 명목으로 소액만 수강자가 부담하다 보니 교육 재정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많은 정성을 들여 후원자 모집에 힘을 쏟고 있다. 후원금을 들고 권력자 앞에 줄 서는 모습을 문학 교실에서 볼 수는 없을지라도 시민들에게 문학의 가치를 알게 하고, 인문도시의 면모를 세우는 데 동참하는 줄이 이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