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기 칼럼] 증자(曾子)의 도(道)
증자(曾子)가 병이 나서 눕게 되자 제자들을 모아 놓고는, “내 손을 펴 보아라. 내 발을 살펴보아라. 『시경』에 ‘전전긍긍하며 깊은 물가에 서 있는 듯,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듯하다’라고 하였는데 이제야 그런 걱정을 면하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이것은 죽음을 앞에 둔 증자가 제자들에게 자기 몸을 살펴보게 하면서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손상하지 않고 잘 보존해야 한다는 평생 걱정을 비로소 덜게 되었다고 안도하는 말이다. 이 말은 효에 대한 증자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효경(孝經)』은 공자와 증자가 효에 관하여 문답한 것을 기록한 경전이라고 전하는데 ‘공자가 뜻은 춘추(春秋)에 실었고, 행실은 효경에 실었다’라고 할 만큼 효의 전범(典範)으로 알려져 왔다. 또 공자의 문도 중 증자는 효에 관한 도를 이룬 사람이었다. 증자의 효행에 관해서는 『맹자』 편에도 잘 기록이 되었는데, 증자는 아버지를 봉양하면서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끼니마다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다고 한다. 증자의 아버지는 식사를 다 하고 난 뒤에, 그 음식이 더 남았는가를 증자에게 물으면 증자는 언제나 또 있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증자는 아버지의 몸만 봉양한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봉양한 것이다.
사람이 생기고 글이 만들어진 이래 우리 교육은 수신에서 시작되었고 수신의 시작은 ‘효(孝)’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효를 삼재(三才), 즉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가장 이상적인 자연 질서라고 여겨왔다. 그것은 모든 신분계층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최고의 덕목이며, 윤리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는, 증자(曾子)는 고사하고 지난 수천, 수백 년의 교육을 무색하게 하는 놀라운 학술조사 내용 한편을 접하고 있다. 몇 년 전, ‘한국 인구학회 학술대회’에서, ‘한국의 가족과 친족 간의 접촉빈도와 사회적 지원양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논문에 의하면, “OECD 주요 회원국 중 한국만이 유일하게 부모 소득이 높을수록 부모와 자녀의 만나는 횟수가 늘어난다.”라고 분석했다. 이는 우리나라 종합 사회조사와 세계 20여 개 나라가 참가한 국제사회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부모의 소득, 교육수준, 연령, 성별, 결혼상태 등을 분류하여 자녀와 부모 간에 대면 접촉빈도를 계산한 결과다.
이 논문이 분석한 결과는, “부모 소득과 자녀가 만나는 빈도의 관계에서 한국이 유일하게 유의미한 관계로 나타났다”라며 “한국의 친족관계는 정서적 성격보다는 도구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라고 발표했다. 또 한국에서 자녀들이 동거하지 않는 부모를 1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나는 비율은 조사대상 27개국 중 최하위인 21%로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이 말은 자식들이 돈 있는 부모에게 찾아가는 빈도가 돈 없는 부모를 찾는 빈도가 낮다는 것이며 평균 1주일에 한번도 부모를 방문하지 않는 자식이 80% 정도라는 것이다.
낳아 기르는 것은 물론, 결혼시켜 분가한 후에도 종신토록 사후관리(A/S)까지 마다하지 않는 한국의 부모가 이토록 자녀들로부터 배척받는 이유는 물질만이 경쟁의 우선이고 내 것만이 최고여야 하는 그릇된 자식 사랑과 인성교육의 부재가 부메랑이 되어서 날아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밖에는 없다. 동방지국의 효라고 일컬어 왔던 우리의 효 정신은 상실된 지 오래되었다.
이번 어버이날에는 ‘네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라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자식 보듯 부모를 한번 바라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