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수필] 이명耳鳴의 시간
버려둔 날이 많았다.
일상은 헛도는 물레처럼 제자리를 맴돈다. 가끔씩 멍한 눈으로 담배연기만 거푸거푸 내 뿜어 본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무아의 협곡에 날지 못하는 새의 깃털이 희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금빛으로 출렁이던 날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친다.
가슴이 텅 비었다.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비릿한 냄새로 풍겨오고 아름답다는 말도 시궁창 냄새처럼 역겹다. 헤르만 헷세를 쫓고 보들레르의 시에 취해있던 그 날들이 거울 속에서 고개를 내 젓는다. 색깔도 무늬도 없는 무위의 통증은 바퀴벌레처럼 몰래 숨어들어 시도 때도 없이 어깨를 짓누른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며 창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숨도 쉬지 않은 듯 고요하다. 생각도 없이 컴퓨터 자판을 누른다. 지시어가 뜬다. 누르세요. 괜히 머쓱해져 희끗희끗 솟아난 새치를 뽑는다. 조용히 목탁을 두드리고 싶다. 하지만 알고 있는 불경이 하나도 없다.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던 반야심경을 더듬어 보지만 귓불에서 웅웅거리기만 한다.
백색의 공간
눈이 폴폴 내리던 날, 연두빛 목도리를 목에 감아주며 하얀 입김을 뿜어주던 그녀, 그녀의 따스한 손길이 몸속을 파고든다. 재가 되어 날아가지도 못하고 은은한 종소리로 아픈 귀를 후벼 판다. 이순이 넘어버린 나이를 실감하지 못하고 푸른 날의 색깔을 덧칠하는 수묵화만 그린다.
방 모퉁이에 외톨이로 앉아 있는 청자색 주병에 눈길이 간다. 막걸리를 담아두었으면 꿀꺽꿀꺽 마셨을텐데, 비어있다. 냉장고 문을 연다. 막걸리는 없고 고급인양 먹어대던 양주와 비스켓이 비소를 뿜는다. 위선자, 이중인격자, 화들짝 놀라 문을 닫는다.
밖이 궁금하여 다시 창문을 연다. 장맛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그 사이사이로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머리가 아프다. 얼른 손때 묻은 수석을 한 점 들고 내 발등을 찍고 싶다. 해인해기(害人害己), 심술이 울컥 치솟지만 자중하라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이내, 고개를 주억거린다.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른 눈으로 세상을 돌아보았던 눈초리에 힘이 빠졌다. 슬며시 신문을 펼쳐든다.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사건들이 활자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무감각으로 다가온다. 아픈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른다. 욕망도 욕구도 먼지처럼 날아가 버리고 켄샤스의 더스트 인 더 윈드(dust in the wind)를 부른다. 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묵상에 잠겨보지만 왱왱거리며 달려드는 벌떼들의 함성 때문에 통증이 더해진다. 만성중이염이 도진 것일까, 귀후비개를 들고 귓속을 후벼 판다. 이물질은 나오지 않는다.
빗 사이로 보이는 별이 있을까, 천체 망원경이라도 있으면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다. 어둔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검은 눈물만이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저 하늘은 갈 수 없는 곳일까. 하늘 위에는 찬란한 꽃들과 꿈의 나비들이 춤추며 있겠지. 기억의 강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날 환호하며 맞아 줄 수 있을까.
창문을 닫았다.
오색으로 비춰주던 조명등이 빛을 잃고 졸고 있다. 광명의 세계가 무한히 펼쳐질 줄 알았는데 벼락이라도 맞았나,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흐느적거린다. 소리라도 지르지, 악을 쓰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질렀다면 누군가 달려와 구해 주었을텐데, 빛을 잃고 고요의 바다만 펼치고 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오래된 축음기에 바늘을 얹는다. 저음의 목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쇳소리마저 난다. 가슴이 답답하다. 발악을 하며 고함을 지르고 싶지만 목이 잠긴다. 현란한 조명과 굉음이 울리는 클럽에 가볼까, 아니면 공동묘지에 이름 없는 무덤가에서 소리소리 지를까.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비는 하염없이 뿌려지고 있다. 먼먼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린다. 저 소리, 저 소리를 잡자. 천둥소리를 잡으려 마라톤 선수처럼 뛰었다. 숨이 가쁘다. 젖 먹은 힘을 다해 달려갔지만 천둥소리는 가까이 왔다가 달아나 버린다.
언덕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주위에 숨어있는 형형색깔의 말들이 벌레처럼 달려들어 온 몸을 갉아먹고 있다.
약력
소설가, 수필가, 문학박사
현재: 한국현대문학연구소 소장
경기문학인협회 명예회장
계간 『문학과 비평』 대표
국제펜 한국본부경기지역회장 역임
수원문인협회 회장 역임, 현재 고문
수상 : 한국예총예술문화상 대상(문학부문)
경기도문화상(문학부문) 수원시문화상(예술부문)
중부홍익대상(예술부문) 한민족문학상, 현대문학상
저서 : 장편소설 공범자 외 (전 9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