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기 칼럼] 장군, 박진(朴晉)
박진(朴晉, ~1597)은 전라도 순창 출신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중 밀양성, 영천성, 경주성 전투 등 육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맹활약한 장군이다. 그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그는 약관이 조금 넘은 24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했던 출중한 무인(武人)이며 단종조(端宗朝)에 사육신과 함께 절개를 지켰던 충정공 박삼문의 5대손이다.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로 참전하여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써서 경주성을 탈환하는 등 임란 초기 열세를 면치 못했던 육지에서 왜적과 싸워 이긴 장수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이다.
출중한 전투력을 가진 조선 장수 박진이 1597년(선조 30년) 3월 정유재란 중에 명나라 하급 장수 누승선(婁承先)에게 구타당하여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명나라 장수 누승선에게 구타당한 뒤, 그는 죽음에 이른 상황에서조차 감히 사직을 청하지 못했다. 전쟁 중에 남쪽 전지(戰地)로 내려가는 것을 피한다는 혐의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신병을 참고 있다가 얼마 뒤 결국 사망했다. 그러나 그를 구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명나라 장수는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죽은 뒤에 그의 시신을 사간(司諫)으로 있던 윤경립(尹敬立)이 확인하니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고 하였고, 또 한준겸(韓浚謙)도 역시 박진의 뼈가 여러 군데 부러진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쉬쉬하며 병사(病死)로 감춰졌던 박진의 구타 사망 사실은 윤경립이 경연에서 언급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1597년 5월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은 경연장에서 박진이 명나라 장수에게 구타당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의 노모를 구휼할 것을 청했기 때문이다. 박진이 죽은 후 그의 모친은 아들 박진의 묘소 근처에서 살며 묘를 극진히 살폈다고 전한다.
그의 모친이 죽은 후 윤경립과 한준겸의 건의로 조정에서 유족을 구휼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박진은 사후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증직(贈職) 되었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까지 추증되었다. 임진왜란의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맹장이었으나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박진의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민통선 내에 있던 까닭에 역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다가 경기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을 당시 조선의 왕은 선조다. 선조는 임진왜란에 파병했던 명나라에 대하여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며 충성을 다한 군주다. 재조지은이란 ‘거의 망하게 된 나라를 도와 구원해준 은혜’라는 뜻이다. 그러나 후세의 역사가(歷史家)들은 이 재조지은의 망령으로 병자호란은 물론,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며 전략적 사고를 방해했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즉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백성과 관이 아니라, 자신이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구했다는 점을 강조하여 전란수습의 공을 자신에게 돌리고자 했다는 혐의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만절필동(萬折必東) 재조번방(再造蕃邦)이라고 하며 자신이 통치하는 조선을 나라(國)가 아닌 번(蕃)으로까지 낮춰 지칭하며 명나라에 충성을 다짐했던 선조였다. 군주가 그런 자세이다 보니 조선에 파병했던 명군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시상황을 기록한 서애 유성룡은 “조선에 주둔한 명군(明軍)을 먹여 살리느라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고 하였다. 당시에, “왜군은 얼레빗이고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명군이 조선 백성에게 행한 수탈과 횡포는 왜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심지어 명나라 장수들은 상 하급에 상관없이 조선의 대신과 장수들을 무릎 꿇리고 구타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의 장수 박진이 명군의 하급 장교 누승선에게 맞아 죽은 것도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군(軍)은 사기와 자존감으로 충전되고 존재한다. 나라가 힘들고 위기에 처할수록 국민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한데 모을 군주의 어젠다(agenda)가 중요하다. 최고 권력자가 설정한 어젠다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위력을 가지며 지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적군과 싸워 이긴 장수가 전투 중에 전사한 것도 아니고, 도와주겠다고 파병된 우군으로부터 자국의 영토에서 공연히 맞아 죽는 장면을 본 백성들은 절망했을 것이다. 6.25 전쟁 75주기를 맞는 호국의 달에, 필자는 430여 년 전 명나라 군인에게 맞아 죽은 조선의 장군 박진(朴晉)을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