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주성열 교수, 소멸지역의 활성화와 문화 예술 공간의 가치
주제여행포럼 시리즈 기고① 주성열 전 세종대 회화과 겸임교수
【서울 = 서울뉴스통신】 고대 그리스에서 코라(chora)는 신성한 장소로 불렸는데 있음과 없음의 중간 공간을 지칭한다.
의미 없는 공간이지만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는 코라를 ‘신성한’ 공간으로 부르면서 이곳은 ‘장소’이면서 동시에 ‘장소가 아니다’라고 묘사한다.
험준한 돌산이나 사막과 같은 장소는 히브리어로 ‘에레모스(eremos)’라고 불렀다. 인간들이 정해진 장소에 모여 살면서 관습과 법률이 지배하는 공간은 ‘질서’의 상징인 ‘폴리스 (polis)’다. 코라는 혼돈 그 자체로 폴리스가 될 수 없는 버려진 땅으로 ‘에레모스’도 아닌 제3의 공간이다. 코라는 의미를 발견하지 않으면 영원히 침묵하는 공간이다. 1세기경 복음서 저자들은 골고다 언덕을 ‘코라’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마태 복음서에도 ‘에레모스(빈 들, 광야)’의 공간에서 기적을 행한 ‘오병이어’에 대한 말씀이 있다. 네바다 사막에서 탄생한 ‘버닝맨 축제’처럼 롤랑 바르트가 말한 아토포스적인 공백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유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우주 창조 이야기를 기록한 <티마이오스>라는 책에서 코라는 형상과 물질은 아니지만, 만물을 담을 수 있는 ‘수용체’, ‘원초적인 공간’, ‘만물을 떠받치는 기저’ 혹은 ‘틈’이라고 설명했다. 창조적 과정을 통해 수동적인 터의 개념이 아니라 새로움을 잉태하는 틈 혹은 사이의 장소라는 것이다. 폐허의 공백과 마주하는 순간 일시적인 멈춤이 일어난다. 실체가 아니기에 쓸모없는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폐허의 공간은 새로운 문법을 창안하거나 창조적인 차원이 발생할 수 있는 장소다. 몰락하여 삶의 끝자락에 도달해야 새로운 가치가 탄생한다. 세상에 편입되지 못한 채 좌표도 없는 아토포스지만 백지의 공간일 것이다. 자신을 정의할 의미를 본질로 가지지 않는 우주에 생성되는 모든 형태는 코라로서 ‘사이’라는 공간이다.
기능을 잃어버리거나 무관심하게 방치된 공간에서 발견이라는 관점은 지역 소멸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다. 소멸지역의 활성화 방안에서 지역 문화와 예술의 잠재적 기능을 복원하는 점은 그러므로 매우 중요하다. 세계관광기구가 내놓은 문화 관광이 전체 관광의 37%를 차지하고 2000년까지 연평균 15% 성장할 것이란 예측은 상당히 정확하다. 지역의 문화 관광은 문화와 역사적 맥락, 공동체의 가치, 문화유산, 생활양식에 관한 관심이 수반되어 새로운 거주지와 혁신적인 공간을 방문하는 것이다. 지역사회가 구축한 예술, 음식, 축제, 공연 등 주민과 교류를 통해 지역 문화와 생활방식을 경험하며 교류하고 소통하는 형태다. 반복이라는 의미가 있는 ‘여정’이나 여행은 다양한 공간을 다녀오지만 같은 장소를 맴도는 것이라는 게 라캉의 주장이다. 진정한 여행이 정지되는 순간 방황은 시작되고 발견이라는 새로운 가치에 주목하는 것이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프랑스 초대 문화부 장관 말로는 1959년 취임 후 파리 중심의 문화예술 활동을 지방으로 확산시키고 수준 높은 창작과 엘리트의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전 국민에게 골고루 확대하고자 ‘문화의 집’을 추진했다. 문화와 예술의 수준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눈높이를 품위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예술경영방침이었다. 10만 명 이상의 도시에 복합문화공간 형태의 ‘문화의 집’을 설립하여 다양한 분야의 예술 활동과 영화, 전시, 서커스를 가까운 공간에서 직접 접할 수 있도록 주민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문화의 집’ 기획은 1973년에 효과를 달성하지 못한 측면이 있어 사업은 중단하고 말았다. 이후 프랑스는 1992년 문화통신부가 제안하고, 2년 후 문화통신부 산하단체가 ‘세계 문화의 집’을 운영한다. 파리시와 외무부의 재정적 지원을 통해 문화예술 탐방과 연수 프로그램 중심으로 진행했다. 문화는 생명체와 유사하기에 교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문화는 일방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문화의 다양성은 다양한 인간의 확장성 속에서 드러낸다.
지역사회 곳곳에 소외되거나 돌보지 않던 폐허의 공간은 처음부터 가치가 없지는 않았다. 나름의 지역적인 특성과 가치로 창출한 삶의 공간이었으며, 나름의 가치를 구현하던 특정한 장소였다. ‘지역관광’에서의 ‘지역’은 본래의 능동적인 가치를 가지고 시간의 축적을 쌓아가고 있었을 장소다. 이제 지역사회는 증상에 처한 장소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주목받는 공간으로 재평가하기 위해 지역민들의 자신이 살던 공간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소소한 변화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산업사회 이후 문을 닫은 공장, 폐쇄된 창고, 방치된 마을회관, 학교, 기관시설 등 재활용할 공간은 많다. 폐교를 창작공간으로 활용하는 사례로는 당진의 ‘아미 미술관’, 제주도의 김영갑 갤러리, 드론 교육 장소, 문화카페 등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으로 탈바꿈한 곳들이 있다.
‘테이트 효과(The Tate effect)’는 영국 ‘밀레니엄 프로젝트(The Millennium Project)’의 목적으로 진행되었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미술관의 성공적인 비결을 지칭한다. 테이트 모던은 템스강 남쪽에 폐기되어 있던 화력발전소를 활용하여 2000년 현대미술전시관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로 인해 완전히 쇠퇴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하였으며, 관광객을 유치하여 세계적인 미술관으로서 위상을 얻어 낸 파급효과를 얻었다.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은 방문자 수 세계 2위의 미술관으로 거듭나면서 도시재생 효과의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이다.
청주에는 2004년에 문을 닫은 연초제조공장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국립현대미술관청주관’이 2018년 개관했다. 개방 수장고의 형식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2021년 개관한 새롭게 선보인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과도 유사하다. 프랑스 마르세유 ‘라 프리쉬 라 벨드 메’, 스페인 마드리드의 타바칼레라 예술센터의 담배공장 재생사업은 슬럼 지역을 예술가의 창작활동 공간으로 탈바꿈한 유사한 사례다. 유효기간이 지난 식량창고였던 프랑스의 ‘레 프리고’, 핀란드의 케이블 공장, 노르웨이의 곡물 저장용 공간인 ‘쿤스트실로’ 네덜란드 베스터 석탄가스 공장은 현대미술의 저장고로 재탄생한 곳이다. 독일 맥주 양조장 ‘쿨투어브라우어라이(KulturBrauerei)’는 문화 양조장, 홍콩의 교도소였던 ‘타이쿤’은 작품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대만 나무의 거대한 창고였던 ‘가오슝’은 ‘보얼예술특구’로 도시재생의 모범 사례로 지역의 활기를 되찾아 주는 공간이다. 그러나 접근성, 개방적인 공간성, 훌륭한 프로그램의 지속성이 수반되어야 성공적인 도시재생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프랑스 산악지방인 ‘오리악 거리극 축제’는 1986년 이후 소외된 지역을 세계적인 거리극 축제 공간으로 활성화해 꾸준히 이름을 알리고 있다. 채석장을 연극무대로 활용하는 아비뇽 연극 페스티벌은 포천 채석장의 모델로 제시한 사례이다. 일본의 버려진 섬 나오시마의 변신처럼 무한하게 열려 있는 기회도 있다. 지역사회는 폐쇄적인 측면도 있지만, 직관적이며, 나누어진 것을 모으는 공동체의 공간이기도 하다. 지역 문화는 계절에 따르는 실제 경험과 체험을 중시한다. 지역사회의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사회를 이끄는 힘을 발견하고 사고를 다양화할 수 있는 잠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예술과 삶이 분리되지 않으며 기존 질서와 전통에 대한 존경심 등이 미적으로 표현되었음을 인식하여 문화유산을 보호, 보존하는 노력을 곁들여 지역적인 관광자원 개발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요즘 지역사회를 방문하면 ‘도시재생 뉴딜 사업’으로 소외된 지역의 가치를 재구성하는 현장을 종종 만난다. 문화는 민주화와 다양성을 기본 삼아 실현해야 효과가 지속한다. 대중의 삶에 미미하지만, 영향을 끼쳐 서서히 확장하는 방식의 느림의 교육과 효과적인 지원정책이 스며들도록 보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예술의 사회적인 효과는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단시간에 효과를 보여주는 일이 아니다. 대중의 삶이 품위 있는 방향으로 스며들도록 지원을 하고 스스로 굴러가도록 자발적 참여의 기회를 다방면으로 제공해야 한다.
※주성열 교수
-파리 1대학 예술철학 기초박사
-성균관대 공연예술 박사 수료
-모던 라이프 아트디렉터
-단국대 서양화과 겸임교수 & 산학연구원
-연성대, 극동대 호텔관광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