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기 칼럼] 결초보은 (結草報恩)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부 위무(魏武)에게는 아끼는 첩이 있었다. 위무가 병이 들자, 아들 위과(魏顆)에게 “내가 죽거든 저 여자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改嫁)시켜라.”라며 첩의 후일을 당부했다. 그러나 병이 더 심해져서 죽음에 이르자 “내가 죽으면 저 여자를 내 무덤에 순장(殉葬)시켜라”고 유언했다. 위과는 아버지가 정신이 있을 때 했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되어 서모(庶母)인 그 첩을 개가시켜 순사(殉死)를 면하게 했다.
훗날 진(秦)나라의 침공으로 위과는 전쟁터에 나가 진(秦)의 장수 두회(杜回)와 겨루게 되었다. 두회(杜回)를 맞아 양측이 싸우면서 위과는 위급한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싸움터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잡아매어 온 들판에 매듭을 만들어 놓았다. 적군들이 말을 타고 공격해 오다가 거기에 걸려 이리저리 고꾸라졌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두회가 탄 말도 풀에 걸려 넘어졌고 그 틈을 타 공격하여 적장 두회를 사로잡았다. 이 싸움에서 열세에 있던 위과는 예상치 않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위과는 자신을 구해준 그 노인이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싸움이 끝나고 보니 홀연히 사라져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위과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 나타난 그 노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대가 순사를 면하게 하고 개가(改家)시켜 준 여인의 아비요. 그대 부친이 제정신이었을 때 했던 말을 쫓아서 내 딸을 출가시켜 주었소. 그 후로 나는 그대에게 보답할 길이 없었는데 이제야 그 은혜를 갚게 된 것이오.”라고 말하고는 꿈에서 사라졌다. 첩의 아비 혼령이 싸움터의 풀을 모두 묶어 놓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공격해 오던 적의 말이 풀 매듭에 걸려 넘어지게 함으로써 위과를 위급한 상황에서 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하였다. 그는 혼령이 되어서라도 딸의 은혜를 갚았다. 이는 『춘추좌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결초보은(結草報恩)은 풀을 묶어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죽어서라도 은혜를 잊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30여 년 전 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던 ‘원이 엄마’의 결초보은 이야기는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안동지역에서 묘지를 이장하던 중에 무덤에서 나온 머리카락을 잘라 삼은 미투리 신발과 편지 이야기다. ‘원이 아버지 보셔요’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물론 450여 년 전 당시 언문으로 쓰여졌지만 현대어로 풀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당신은 늘 내게 '둘이 함께 머리 하얘지도록 살다가 같이 죽자'고 했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은 내게 어떤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또 당신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았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꿈속에 찾아와 당신 모습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이 분묘의 주인공은 철성이씨(鐵城李氏) 이응태(1555~1586)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응태가 병석에 눕자 그 아내가 남편의 건강을 기원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삼 껍질과 섞어 미투리를 삼은 것으로 병석에서 일어나 이 신발을 신으라는 의미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내의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 신어보지도 못한 미투리를 편지와 함께 무덤에 넣었을 것이다. 미투리를 싸고 있던 한지에 ‘내 머리 베혀’, ‘이 신 신어보게’라고 쓴 글씨가 흐릿하게 남아 있기에 아내인 원이 엄마의 머리카락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여성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중대한 결심임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이 엄마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미투리를 삼은 것은 극도의 정성으로 남편 회복을 기원한 표징이다. 이와 유사한 기록으로는 1602년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의 아내가 만든 머리카락 미투리를 들 수 있다. 당시 산청 현감으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푼 김대현이 죽자 장례를 도와준 산청 고을 백성에게 결초보은한 김대현 아내 이야기다. 그의 아내가 산청 고을 백성들이 도와준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정성껏 미투리를 만들어 산청 고을에 보낸 것이다.
은혜를 입은 마음이 뼈에 새겨져 잊히지 않는다는 각골난망(刻骨難忘), 난망지은(難忘之恩) 따위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베푼 마음은 잊어도 되나 받은 은혜는 오래 가슴에 담아야 한다. 머리카락을 잘라 보은할 일도 아니면서 삭발이라는 극단적인 표현방식으로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삭발에 앞서, 평생 살면서 결초보은의 은혜를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먼저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