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의 문학광장] 가을의 목소리는 낙엽으로 듣는다
올해는 유난히 가을을 재촉하는 빗소리가 달다. 다른 해에 비해서 비의 호흡이 길어 지루한 감이 있지만 세차게 내리지 못하고 주변을 살피는듯한 정서가 도리어 감성을 자극한다.
세월의 나이인가 어느새 반 백이 훌쩍. 한번도 거르지 않고 가을은 그렇게 왔다.
낙엽이 곱다는 것은 세상이 더 잘 알겠지만 저마다 애틋하게 다가온 가을 낙엽은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 없다.
내가 만난 젊은 날의 낙엽은 그저 곱고 예뻤다. 책갈피에 끼워서 압화를 만들 때도 벌레가 먹거나 갈 빛이 나는 낙엽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었다. 원색에 가까워 눈부실 정도로 붉은 빛을 띤 다섯손가락 단풍잎을 고르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간신히 골라서 책갈피에 끼우려 하면 빨간 단풍잎은 어느새 축 처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도 잠깐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은 여운을 가슴 속에 남겨 주었다. 누구에게 주려고 이렇게 책갈피에 끼우려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면 어김없이 그 대답은 물음표로 끝나는 기분이었지만 마냥 설레이며 빈 가슴을 물들였다.
대상 없는 그리움은 더욱 애잔하고 순수한 감정에 빠져든다. 세월이 흘러도 가을이 오면 한 번씩은 책갈피에 끼워 둔 단풍잎이었다, 어느 핸가 그 단풍잎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지나 책도 단풍잎도 변색이 되어 바스스 말라가고 있었지만 무심히 책들 속에 숨어 들었다. 상상 속의 그리움만 내 안에 남긴 채 망각이란 이름표를 동시에 바꾸어 달았다.
신혼 때는 가을 산에 심취하여 매주 어린아이들과 산에 올라가 도토리도 줍고 예쁜 단풍잎을 모아놓고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며 누가 많이 단풍잎을 모으나 내기도 했었다. 아이들은 머리에 작은 별 모양 모자를 쓰듯이 단풍잎을 꽂기도 하고 후후 불면서 자유로운 훌랄라 춤을 추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시간들이었다. 특히 가을이 되어 시골 아버님 산소에 가면 주러주렁 밤송이들이 보고 싶었다면서 우리 가족을 반겨 주었다. 계곡물은 가을볕에 눈부시게 빛났고 두런두런 정다운 시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호두나무에는 토실한 호두열매가 여기 보라는 듯이 둥그런 눈을 벙그렇게 뜨고 우리를 맞이했다.
호두나무 둥치를 탁탁 치면 우수수 호두 열매가 떨어져 발밑에 쌓였다. 물 속의 돌을 집어 호두껍질을 까서 아이들 입속에 넣어 주면 아이들은 다람쥐 볼처럼 볼록하게 호두알을 잔뜩 넣고 아득아득 씹어 먹었다. 정신없이 물장난을 치며 놀다가 달려드는 아이들 입속에 나는 고소한 호두 냄새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제 그 아이들은 커서 여 나무 살이나 먹은 저 닮은 아이들을 기르고 있으니 세월은 유수와 같다. 말수가 적고 듬직하기 이를 데 없는 큰아이가 이 번 추석 때 내려 오더니 거실의 색이 나오다 말다하는 텔레비전을 보고 아무 말도 없이 주문해서 거실에 부려 놓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 기분은 무엇일까. 마치 책갈피에 숨겨 두었던 단풍잎이 감사와 감동의 신호소리를 우렁우렁 내는 것 같았다. 마음 밖으로 두둥둥 소리가 울려 왔다. 웬지 부끄러워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어쩌면 그 아이 결혼식 즈음 하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엄마, 우리 걱정하지 말고 엄마가 번 돈 다 쓰시고 재미나게 사세요.“
은퇴 후의 현실은 다르게 나타났지만 결혼식 때 하던 아들의 말이 생각나서 그저 저희들끼리 잘 살기만 바랬었다. 그러던 아들이 갑자기 우리 부부의 사는 모습을 살펴 보더니 거실과 안방의 TV를 다 바꾸어 버렸다. 작지만 나에겐 큰 고래같은 움직임이었다.
’이 녀석이 이제는 정말 다 커 버렸구나.‘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아이들 아파트 살 때도 돈 한 푼 보태 준 적도 없고 손주녀석 중학교 들어갈 때도 변변히 축하금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꾸물 꾸물 느리게 아들은 하나씩 둘씩 살림을 늘리고 무난하게 잘 살아서 별 걱정을 끼치지 않은 탓도 있었다.
핑계라면 무엇이 바쁜지 정신없이 살다 보니 정작 아이들 돌보는 일에는 너무 많이 소홀했다.
내색 한 번 안하고 잘 살아 주는 아들이 그저 대견스러울 뿐.
아들이 설치해 준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침 출근을 하는데 주차장에 낡은 트럭 한 대가 눈에 띤다. 비를 촉촉이 맞아서 허름한 차체가 반들거리는데 트럭의 뒷면 화물칸에 낙엽들이 오르르 몰려 있다.
꼭 누군가가 주워다 놓은 것처럼. 주인을 기쁘게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바닥을 가득 메워 놓은 낙엽들이 왠지 정답게 느껴졌다. 그동안의 날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은 것처럼 빗물에 윤기 머금은 낙엽들이 따스한 미소를 날리는 것만 같았다.
문득 젊은 날 책갈피에 끼워 둔 붉고 환한 사랑스런 낙엽들은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다. 오늘 저녁 퇴근 후에는 책 장 속을 다 뒤져서라도 설레임을 가득 담은 책갈피 속 단풍잎을 찾아 한 소끔 옛 이야기를 풀어 내야겠다. 아이들 이야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