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수필/처음 같은 일들

2025-11-17     김숙경 수필가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악스럽게 우는 매미소리 때문인지 이른 아침에 들었던 귀뚜라미 소리가 묻힌 것 같다. 하지가 지나고 입추라지만 쉽게 더위는 물러서지 않을 것 같다. 아침저녁으로 느껴지는 바람결이 다르다지만 아직 체감하지 못하고 조금만 더우면 에어컨 리모컨을 잡는다. 전기세 아까워 혼자 있을 땐 좀 참지 하던 인내가 어느 순간 바닥을 보인다. 언제부턴가 바깥사람에 대한 배려나 위주가 내 중심이 되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일도 남을 배려하고 감사하는 한 방편일 수 있기에 나만을 생각하고 내가 중심이 되라는 말들을 위안 삼는다.

이기적인 내 위주를 발맞추어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남편이다. 일례로 신앙과 주일예배까지도 모두 내게 할애하기를 원하니 맞춰 주려고 노력한다. 아마도 2년여 투병하던 내 모습이 아니었다면 변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 절실함에 같이 매달려준 사람, 예고 없이 밤의 깊고 낮음 없이 낮의 환함에도 어두운 곳으로 이끌리어 가던 날, 손잡고 내달리던 응급실과 외래의 번복, 내 인생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온 가족의 힘이 소중했고 살아가게 하는 힘 이었다. 처음을 겪는 혼란 속에 처음 같은 애정과 연민을 들여다 본 계기였다.

무엇이든 처음이던 일들을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눈물로 견뎌내고 버티게 하였고 내 인생은 축복 받았다는 걸 회복의 과정에서 감사한 일임을 깨달았다. 몇 발자국 걸으면 숨이 차 쉬면서 숨을 골라야 했던 일, 경사진 길 층계에 오르내리는 일, 일행 중에서 뒤처지는 걸음 걸이였지만 겨울이 뒤늦은 걸음으로 봄을 내줘도 그 속에서 피는 꽃은 내게 희망이고 고운 꿈이었음을. 무성한 녹음과 뜨거운 햇볕, 과실이 익고 결실을 거두는 두 해째는 첫 해째 보다 보이는 것들, 보는 것들의 결이 달랐다. 한 해는 다시 살아서 볼 수 있을까 하던 절망감에서 두 해째 여름은 소생하며 못다 핀 꽃들의 결실을 바라다보고 있는 일들이 사뭇 달랐다.

도서관 안에 있는 카페에 왔다. 혼자가 아닌 둘이, 이런 일도 처음이지 싶다. 있었다고 해도 기억 속에 없는 걸 보니 이런 일들을 그리 염두에 두지 않는 성격 탓 같다. 그저 데면데면 살아왔던 일들에 그리 의미두지 않는 일들이 이제 새삼스럽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남편은 청포도 에이드 한 잔을 시켜놓고 셀카를 찍는다. 다른 때 같으면 주위 사람을 의식해 거부하던 남편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 준다. 그의 긴 팔로 더 먼 각도에서 촬영을 한다. 흰머리에 화장 안한 본연의 얼굴이 진짜 내모습인 것을 왜 잘나온 사진만을 고집하는지 종두득두이거늘. 세월이 흐르고 이젠 삶도 차분히 정리하고 비워내고 홀가분하게 보낼 준비를 하는 일이 필요한 나이가 됐다. 인생이 반드시 생로병사가 아닌 준비하지 못했는데 떠나보내는 일을 가족사에서 겪고 보니 장담할 수 없는 생들이 도처에 있는 것에 대한 허무감을 감추지 못한다.

원망과 미움 한숨과 막연했던 희망들이 지금은 소중하고 눈물겹다.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일, 눈물과 절망들이 기쁨과 사랑으로 환원되어 다시 시작하는 지금이 황금보다 더 비싸고 가치 이상인 것을 알게 될 때가 오리라 믿는다. 사지에서 헤매다 정신이 드니 누군가 이제부터라도 잘살아 내라고 뒤통수를 때린 기분이다. 다시 태어나고 보니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사느라 지쳐 앞만 보고 옆과 뒤를 돌아보지 못했던 일들을 본다. 가장 어렵고 힘들고 아팠던 시기였지만 내게는 넓은 시야를 가져다 준 처음 같은 일들을 겪게 해준 가장 담담하고 담대하게 만든 계기였음은 분명하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주는 기쁨과 고마움에 내 삶은 분명 달라지기를 바래본다.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시작하고 축복이 주는 감사함에 단단하게 살고 싶다. 산다는 것이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일임을 알기에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살아내고 싶다. 그동안 못 받았고 부족하다고 느꼈던 사랑을 지금은 한꺼번에 다 받은 기분이다. 뭐든지 처음인 것 같은 이 마음 살아있으니 벅차고 감사하다. 이렇듯 그 사람과의 작은 여유가 행복하다. 내가 중심에 있는 꽉 찬 이 느낌 오래 누리고 싶어진다.


김숙경 수필가

약력

한국문인 수필등단. 문파문학 시 등단

수원문인협회. 경기수필가협회. 동서문학회.

수상 수원문학인의상. 경기수필 대상

저서 엄마의 바다 공저 동그라미에 갇히다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