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의 문학광장] 아주 특별한 인연

2025-11-17     정명희 시인·수필가 (경기문학인협회장·경기산림문학회장)
정명희 시인·수필가(경기문학인협회장·경기산림문학회장)

 낙엽이 반은 떨어지고 반은 나무둥치에 붙어 깊어가는 가을을 물들이고 있다.
삼한 사온이라더니 며칠 전부터 예고된 듯 추위가 몰아닥치다 슬그머니 날씨는 풀려있다. 그런대로 마음이 푸근하다. 아마도 집 앞이라 그럴 것이다. 따뜻한 집 생각에 아파트의 밤 풍경은 쓸쓸하지만은 않다.   

 주차장에 차를 대려다 앞을 가로지르며 급하게 트럭을 대는 노인을 보았다. 트럭에서 내리는 분은 한 눈에 연세가 드신 어르신임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다니, 아주 친밀한 분이 아닌데도 반가운 마음에 차의 문을 열고 인사를 한다. 어르신은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쁘냐며 도리어 늦은 귀가를 하는 모습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관심을 표한다.
 
  괜스레 쑥스러워진다. 뭐가 바쁘다고 이렇게 늦는 거지. 늘 생각하는 귀가 습성은 잘 바꾸어지지 않는다. 멋적게 웃으며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놀다 오는 거예요.”라고 응답은 하지만 만감이 교차한다. 변명 같지만 노는 것이나 일이나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쓸 데 없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명감에 불타 책임이라는 미명 하에 일들을 끌어 안고 사는 자신이 한심할 때가 더 많다. 
 
 문득 주위를 살피니 주차장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일부 세워둔 차들을 안전하게 지켜준다.소리 없이 떨어지는 가을 낙엽들은 시간이 늦으면 늦을수록 주차장에 체워지는 차들의 모습을 조망하고 있다. 바람이 살랑 부니 주차해 둔 차 위로 낙엽들이 늦은 밤을 즐기듯 미끄럼을 타고 있다. 어르신의 트럭 가지런한 종이박스들 사이로 낙엽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아마도 박스의 특새가 아늑한가 보다. 촘촘히 자리를 잡은 사이로 끼어디 말이다.

 얼마 전 아침엔 어르신 트럭바닥에 고운 낙엽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마도 어르신은 전 날 종이박스들을 다 매각하셨던 듯 하다. 갈 데 없는 낙엽들이 어르신 트럭 바닥에 모여 있는 모습은 웬지 띠뜻하고 정감있게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색깔들이 천차만별, 밤 중에 하늘의 별들이 내려 왔나 보다.

 트럭의 다양한 모습 속에는 어르신의 웃음이 들어 있는 것 같아 혼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실 어르신과의 만남은 몇 달 전으로 거스른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주차장에 들어서니 어르신께서 내 차 앞에서 왔다 갔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계신다.
 “ 무슨 일이 있으세요? ”
어르신은 지난 밤에 드신 술이 아직 덜 깨셨는지 술 냄새가 진동한다.
 “ 아, 글쎄 제가 오지랖도 넓지. 아침에 출근하는 분들이 차문을 잘 열게 조금만 차간 거리를 넓게 해 드리려고 하다가 그만 차 옆부분을 긁었지 뭐예요.”
 순간 언젠가 늦은 밤 주차장에 차를 대려다 옆 차를 긁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 때는 차를 긁었는 줄 모르고 집으로 들어와 잠을 잤다. 그렇잖아도 걱정이 되어 깜깜한 밤 중, 차를 에둘러 살펴보았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까. 안 보였던 탓이리라. 아침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상대방 차주가 화를 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어젯밤에 술 먹었느냐고 묻기까지.

 그 생각이 떠올라 비시시 웃어 버리고 전화번호를 드리며 “보험회사에 연락하세요.”라고 했다. 어르신의 마음이 참 따뜻하다고 생각하면서. 술을 드셨는데도 옆 차 걱정을 하시다니. 

 보험으로 해결해도 그 찻값을 보상하려면 폐지박스를 얼마나 모으셔야 할까. 마음이 편치 않아 며칠 동안 어르신 생각을 하다가 용기를 냈다. 어르신께 전화를 드렸다. 약간의 경비만 주시면 된다고. 

  이번에도 가로들 불빛을 받으며 왔다 갔다차를 대는 모습을 지켜보시는 어르신의 모습이 어린시절 우리 할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이 같은 아파트 주민이라는 것이 기분이 좋다. 연세가 들어도 일을 놓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 충실한 모습 또한 얼마나 멋지고 소탈한가. 
  얼마 안 되지만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술 한잔 하시며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오시는 건강한 모습. 세상에는 삶 자체에 자학하고 힘들어하며 주위를 원망하고 괴롭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어르신의 인간적인 삶의 모습에 내 마음도 경건해지다 못해 저절로 따스해진다. 

 “어르신, 오래오래 사세요. 술은 너무 많이 드시지 말구요.” 

또 뵙게 되면 오늘보다 더 반갑게 인사를 하리라. 아파트에서 만난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소중하게 어르신과의 한 장면을 깊이 간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