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주민 위한 서민금융업무에 최선 다할 것”

【수원=서울뉴스통신】대담: 김인종 경기남부취재본부장 / 글.사진:류재복 대기자 = 동수원금고는 1980년도에 설립이 됐다. 나는 새마을창단교육 1기를 수료하고 1986년도에 입사를 했다. 금고 입사의 동기는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새마을교육과 정신에 매료된 탓도 있다. 그 후 감사를 거쳐 2011년까지 근무를 한 후 2012년 1월 이사장에 당선, 취임을 했다. 금고 현황은 수원지역 새마을금고 9개중 하나로서 현재는 2위권에 속하고 있다. 2005년도에 자산 1000억을 달성했다. 내가 취임 6년이 된 현재 2018년 9월 5000억을 달성했다. 금고는 규모가 커야 한다. 반면 그간에 13억의 대출부실도 있었지만 계속 확장사업을 실시해 나갈 것이다.

-새마을금고에 대해 알고 싶다.
▶새마을금고는 이웃간 서로 돕고 사랑하며 협동하는 우리 고유의 자율적 협동조직인 계, 향약, 두레 등 마을생활의 공동체 정신을 계승하고, 협동조합의 원리에 의한 신용사업, 공제사업 등 생활금융과 문화복지 후생사업, 지역사회개발사업 등 통해 회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지역 공동체의 발전과 국민 경제의 균형 발전에 기여하는 금융협동조합이다. 1963년 이래 재건국민운동의 향토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돼 온 새마을금고는 1972년 법인설립에 착수, 1973년 재건국민운동에 병설해 새마을금고연합회를 창립한 후 1975년 독립, 새마을운동의 주요 시책사업으로 육성됐다. 1982년 12월 31일 ‘새마을금고법’이 법률 제3622호로 제정됐다.

-새마을금고의 시발이 된 새마을운동에 대해도 한 말씀해달라.
▶새마을 운동을 ‘신향촌운동’(新鄕村運動)으로도 부르고 있는데 이 운동은 1970년 초 대한민국 농촌의 현대화를 위해 시작, 박정희 대통령 정부 주도로 시행된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은 풀뿌리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이 운동은 ‘새마을운동’으로 명명되면서 전국적으로 시행,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해 전 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기자님께서도 알고 있듯이 당시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새마을노래’가 이때부터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됐고 이로 인해 전국 국민운동이 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경제 4단체도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했으며, 1973년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이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 노력이 지속됐다. 그 후 새마을운동은 농업 경쟁력을 향상시켰고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공동체 의식 자발적 참여 의식을 회복에 기여했다. 이후 이 운동은 세계적으로 농촌 개발의 모델이 됐고, 지금도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획기적인 정책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유엔(UN)은 새마을운동을 바탕으로 한 ‘새천년마을계획’이라는 아프리카의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추진할 만큼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재직 시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워볼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현재는 해외 74개국으로 새마을 운동이 수출됐으며, 후진국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배우겠다며 방한하는 해외지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맡고 있는 나 자신의 새마을운동을 정의한다면 첫째 근면(勤勉:부지런히 일하며 힘쓴다), 둘째 자조(自助:자기의 발전을 위해 애쓴다), 셋째 협동(協同:서로의 마음과 힘을 합친다)을 말하고 싶다.

-새마을교육은 수원지역과 연관이 있다고도 하는데?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해 이전까지 농협대학에서 개설해 운영,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했다. 연수원 설립 후 첫해1490명, 1974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했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수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사장으로서의 경영방침을 알고 싶다.
▶친절·소통·인화단결 등 세 가지를 모토로 로 경영을 하고 있다. 첫째, 친절은 우리 ‘동수원 새마을금고’의 트레이드마크다. 둘째, 소통은 회원과 직원, 직원과 직원, 상급자와 하급자 서로가 대화를 해 모든 문제들을 서로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 셋째, 인화단결은 개인 한 사람의 욕심대로 일하는 것이 업무에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화합해 소기의 성과를 대기의 성과로 이루는 것이다. 또한 지·행·용·훈·평(知·行·用· 訓·評), 즉 알고(知), 행하고(行), 사람을 잘 쓰고(用), 잘 가르치고(訓), 평가(評)를 하는 것으로 이는 경영자가 갖춰야 할 자질 다섯 가지 능력을 말하는 것인데, 나는 이 다섯 가지를 모토삼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으며, 국민모두가 ‘새마을금고’를 서민금융의 대부라는 인식이 스며들도록 노력하는 경영을 하고 있다.

-지역에 대한 활동도 많다고 하는데?
▶우리 동 수원새마을금고가 있는 지역의 구 매탄시장 활성화 방안과 살기 좋은 안전한 매탄1동을 만들기 위한 기관 간 협력방안에 대해 항상 논의를 하고 있으며, 특히 지역발전을 위한 자발적인 주민참여 방법에 대해 심도 있는 토의를 실시하고 있고, 지역 내 각 기관끼리 행사 등 협조가 필요할 경우 적극 참여해 지역의 화합과 발전에 동참하고 있다.

-최덕헌 이사장만의 ‘뉴 새마을운동’은 무엇인가?
▶첫째 변화로서 사물의 모양이나 성질이 바뀌어 달라지는 것을 말하고, 둘째 도전으로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거는 것이며, 셋째 창조로서 새로운 것을 처음 만들어 내고, 넷째 모방으로 다른 것을 그대로 본떠 만들거나 옮겨놓는 것이며, 다섯째 유어 원(your own)으로 혼자만이 할 수 있는 것과 여섯째 베스트(best)로 최상·최고를 나타내는 운동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보람을 느끼는 일과 아쉬운 일이 있다면?
▶수원지역자율방범대 명예대장으로 지금도 봉사를 하고 있지만 충남 아산이 고향인 내가 오산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와 쌀가게와 연탄배달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당시 지역의 치안이 좋지가 않았다. 그래서 90년대초 어렵게 사는 소상인들과 지역주민들의 범죄예방을 위하고 또 봉사를 위한 각오로 117명의 방범대원을 조직해서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지키기 시작했다. 이 일로 인해 시의원이 됐고 그 후에도 매일 새벽 4시까지 활동을 했다. 이 조직은 현재까지 30년간 유지를 해오면서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는데 매우 보람을 느끼고 있다.

또한 통장으로만 20년 활동을 하면서 매탄1동 통장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지역주민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당시는 관변단체로서 인정을 받아 내 돈을 써가면서 봉사를 했지만 요즘은 서로들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나는 또 1998~2002년까지 시의원을 한 적이 있다. 도시건설위 소속으로 활동을 했는데 당시 광교저수지를 준설하면서 제대로 공사를 못해 자연환경이 훼손된데 대해 지금도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 당시 나는 “아주대 뒷산을 녹지로 남겨야 한다”고 주장을 했지만 내 주장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개인적인 신념, 철학, 좌우명이 있다면?
▶‘봉산개도 우수가교’(封山開道 遇水架橋)로 즉 ‘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는다’는 말처럼 살고 싶다. 나는 늘 직원들에게 삶의 가치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첫째, 자신에게 진실 하라. 둘째, 남을 도와주라. 즉 상대를 배려하라. 셋째, 매일 매일을 최고의 날로 만들어라. 넷째, 좋은 책의 내용을 깊이 소화하라. 다섯째, 우정을 예술처럼 아름답게 가꿔라. 여섯째, 만일에 대비하는 계획을 항상 세우라. 일곱째, 기도하고 모든 축복에 감사하라. 여덟째, 항상 남이 잘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나의 철학이고 신념이다.

“故심재덕 수원시장을 가장 존경하고 있다”면서 “선견지명이 강한 심 시장 그 분의 행동과 철학을 내 삶의 모토로 삼고 있다”는 최덕헌 이사장(68). 그는 지금도 지역사회 소외계층을 위해 ‘좀돌이운동’을 펼치고 있다. 올해 설에는 20kg쌀을 지역의 어려운 이웃에 전달했는데 이 운동은 매년 실시하고 있다. 그는 또 20년 역사를 간직한 산악회도 운영을 하면서 매월 1회씩 20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 산행하고 있다. 그는 지역 내 대소사 등 많은 활동을 통해 도지사, 경찰청장, 시장 등으로부터 많은 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양보와 배려의 정신 탓으로 언제나 자신보다는 아랫사람에게 양보를 해 그를 대신해 다른 사람들이 상을 받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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