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華城의 문화적 특성 살려 수원의 문화경제 콘텐츠 개발해야”

한원찬 미래통합당 수원시의회 대표의원.
한원찬 미래통합당 수원시의회 대표의원.

【 수원=서울뉴스통신 】 대담=김인종 편집위원장/ 글·사진=김동초 대기자 = 사람들이 얘기하는 인물들 중 감동을 주는 케이스는 대부분 ‘입지전적(立志傳的)‘인물들이다. 남들보다 어렵고 척박한 환경에서 나름의 성공신화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성공의 정도가 얼마나 크냐에 따라 감동의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입지전적인물은 대부분 존경의 대상이다. 그렇게 입지전적인 인물 중 한원찬 수원시의원은 남들보다도 좀 더 악조건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꿋꿋하게 환경을 극복한 몇 안 되는 케이스로 보여진다.

한원찬 시의원은 1964년 1월 15일에 경상북도 포항의 기계면이라는 ‘깡촌’에서 농사를 짓는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거쳐 ‘기계中’을 나왔다고 한다.

가정 형편상 생계를 위해 실업계인 공고진학을 택했으나 당시 담임 선생님이셨던 권영식 은사가 공고원서를 안 써주시고 인문계진학을 권해 부모님과 상의 끝에 인문계인 경주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고 했다.

졸업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군 입대 전까지 생계활동을 해야 했기에 포항제철 협력업체에서 1년 정도 자취를 하며 직장생활을 하던 중 불규칙한 식사로 인해 심각한 위궤양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수술비용이 없는 관계로 사회에서 치료가 불가능했기에 아픈 상태에서 부득이하게 입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입대 후 위궤양은 더욱 악화됐고 군 복무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결국 한원찬 시의원은 근무지인 GP에서 후송돼 춘천육군병원에서 수술 등 한 달 동안 치료기간을 거 쳐 1년 만에 ‘의병제대’를 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한의원은 가난과 병마가 동시에 겹치는 최악의 불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결국은 수원에서 자수성가 후 정치계에 입문, 지역사회에서 커다란 두각을 나타내며 지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고 있는 중이다.

이에 본지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지역사회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한원찬 수원시의회 대표의원을 만나 존경심을 바탕으로 한 진솔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 “나에게 절망은 없다”란 옛날 라디오 특집이 생각난다. 어디서 그런 역경을 헤쳐 나갈 용기가 생기셨는지?

-용기라기보다는 사람은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생존을 위해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해서 가난을 택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지방의 많은 국민들이 저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중 한사람의 국민이었을 뿐입니다. 아무튼 군에서 의병제대를 한 후 저는 고향으로 내려가 1년 정도 요양을 한 후 생계를 위해 노력하던 중 울산에 있는 ‘태왕산업’이라는 곳의 직원채용 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스판텍스’에서 1년 정도 직장생활을 이어 가던 중 87년 10월 경, 수원 원천동에서 통닭집을 운영하시던 육촌형님의 연락을 받고 수원으로 올라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직장생활보다는 장사를 배워 앞날을 대비하라는 권유였습니다. 이게 처음으로 수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지동시장(현재는 ‘미나리광‘시장)에서 식자재를 취급하는 광천상회라는 곳에서 점원으로 근무하며 포장이나 배달 등을 맡아서 수원역까지 ‘짐 자전거’로 물건을 실어 날랐습니다.

숙소가 없어 점포에 딸린 창고에서 숙식을 했고 일 년에 6일 정도만 쉴 수 있을 정도로 중노동에 시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할 때면 겹친 피로로 인해 ‘코피’가 터지기 일쑤였고 거의 쉴 수 있는 여유가 없던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 그렇게 힘든 시기가 언제까지 지속됐으며 얼마나 어려웠는지요?

-한 6~7년 동안 죽을 고생을 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결국 건강 때문에라도 지동시장에서 1년 반 정도 근무 후 인계동 생선가게로 직장을 옮겼으나 그 곳은 더욱 근무환경이 열악해 3개월 만에 우만동 현대아파트 안에 있는 ‘현대 슈퍼’에 취직을 해 판매와 물건정리, 청소 · 배달 등 온갖 잡무를 맡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 보니 납품업체에서 대리점 업무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고 직장을 옮겨 ‘천일냉동식품’에서 한중식품 대리점근무를 시작했습니다. 수원시 전체 486개의 거래처를 담당했고 월급은 사장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았던 관계로 거의 가계수표로 받았습니다.

숙소도 돈을 아끼기 위해 동료와 함께 수원고등학교 뒤 ‘팽나무고개’에서 방을 얻어 생활을 했고 2년 반 후, 사장의 무리한 체인사업 확장으로 부도가 나면서 다시 거리에 나앉게 될 처지로 전락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친척집에 신세를 지는 것도 싫고 이렇다 할 친구도 없어 처음으로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지동시장의 광천상회에서 새벽5시부터 알바를 하며 끼니를 해결 하기도 했습니다.

▲ 언제부터 조금씩 희망이라는 끈을 잡을 수 있었는지?

-계속 어려웠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의지할 수 있는 짝이 생겼으니까요. 육촌 형님의 소개로 집사람을 만나 큰 애를 얻은 후인 91년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당시 포항 시골집에서 300만 원 정도의 자금을 지원해줘 ‘산드래 미(매탄동)’에 구멍가게를 얻어 비로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구멍가게는 집 사람이 보았고 저는 여전히 대리점 쪽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소위 맞벌이 부 부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성실하게 대리점 업무를 계속 하다 보니 수원에서 하나 둘 제법 인맥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취급품목도 점점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해파리와 수입고사리, 계피 등 소분작업을 해서 시장납품을 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가게 운영경험이 없어서인지 구멍가게는 망했고 남은 돈 50만원으 로 입북3리 ‘축사촌’에 방을 얻었지만 분뇨냄새와 파리 때문에 생활이 불가 능해 우만2동의 ‘함바식당’을 하던 자리를 빌어 맨바닥에서 생활하며 아내는 소분작업을 했고 저는 판매와 알바까지 병행했습니다.

그렇게 절치부심하며 3년 동안 고생을 한 후 93년 경 우만동 콘크리트 건물 로 이사를 할 당시에는 행복감마저 느꼈답니다.

지역사회활동과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이사 후 내친 김에 용기를 내 취급품목을 햄이나 캔 종류까지 넓혔고 사업 확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활동의 폭이 넓어지며 지역사회에서 우만2동 자율방범대참여 등 사회참여제의가 들어왔고 애를 키우는 입장에서 치안의 필요성도 절실했기에 흔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지난 시절 생계가 어려웠을 때를 생각하며 공동체의식이 강하게 필요했던 만큼 지역사회봉사활동에의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자신의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 집을 비우라는 요청이 들어와 은행에 서 대출을 받아 3층짜리 허름한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소분작업(상품분류작업) 시 이점을 살려 운영하던 포장마차가 잘 되었고 점차 수입이 증가함에 따라 목욕탕이었던 건물을 ‘리모델링’을 통해 3층은 숙소로 쓰고 1~2층은 창고로 썼습니다.

이어 지동 동사무소에서 자치위원과 바르게살기운동 수원시협의회 부회 장제의도 들어왔습니다. 이후 바르게살기위원회 회장을 거쳐 지역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시기에 정치 쪽에서 참여권유가 들어왔지만 처음에는 계속 거절을 했습니다.

하지만 계속된 요청으로 결국 정치계에 참여를 하게 되었고 처음 도전했던 2010년 지방자치 시의원선거(행궁동·인계동·지동·우만1~2동)출마 낙선을 맛보았습니다.

다시 4년을 기다려 2014년도 지방선거에 재 도전을 해 시의회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룩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고 이렇게 해서 드디어 본격적인 정치인으로 입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의원님의 지역구 현안 중 가장 시급한 현안과 의원님의 계획은?

-‘구(舊)’도심이란 용어를 ‘원(原)‘으로 우선 용어수정작업을 했으면 합니다. 원도심의 도시재생작업에 대한 원칙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원도심들은 세계적으로 현대도시화를 통해 반드시 재개발과 재건축을 수반합니다.

도시재생은 국비나 도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재개발과 재건축은 입주 자들이 부담을 느끼는 작업입니다. 재개발이나 재건축은 진행과정에서 주민 간의 갈등이 유발되고 많은 불상사들이 생겨납니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지역경제가 직격탄을 맞고 있고 소비가 둔화되는 추 세에서 원도심의 기능회복(인구유입 등)을 위해 정착주민의 확보와 성장 동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일거리나 먹거리 등 어떤 아이템이든 간에 청년들의 참여가 매우 중요합니다. 市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수원 천’을 개발하고 그들이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아이템과 공간마련이 시급합니다.

▲ 의원님의 지역구민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우리지역은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이 있는 지역입니다. 그 문화적 특성을 살려 문화와 경제를 아우르는 문화경제 콘텐츠를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은 현재보다 미래를 보고 설계 · 시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민들이 모두 힘을 합쳐 충분히 함께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좀 더 적극적인 의지와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해 생동감 있고 활기찬 지역구를 만들겠습니다.

항상 주민 여러분들이 주인공인 지역구를 만들어 주민들이 행복한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를 믿고 선택해주신 주민여러분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의정활동 을 펼쳐나가겠습니다. 다시 한 번 주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끝으로 의원님의 인생 좌우명은 무엇이신지요?

-“자신을 갖고 최선을 다하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장점이 있고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사회적 갈등이 양극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서로를 위하고 위로 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서로 힘을 합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거듭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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