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왜하냐고요? 천직이니까 하지요”

정운봉 한국연극협회 수원시지부장이 카메라앞에 포즈를 잡았다.
정운봉 한국연극협회 수원시지부장이 카메라앞에 포즈를 잡았다.

사람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재능의 크기와 열정은 천차만별이지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열정을 다해서 만개시킬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재능이 있거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사용하라. 쌓아 두지 마라. 구두쇠처럼 아껴쓰지 마라. 파산하려는 백만장자처럼 아낌없이 써라’ 아일랜드 극작가 브렌던 비언이 남긴 말은 재능이란 원석을 어떻게 제련시켜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구절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인 정운봉 한국연극협회 수원시지부장은 한평생 연극과 연극계를 위해 헌신해온 인물이다. 정운봉 지부장은 젊은 시절, 진로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다 직접 연극배우의 길을 걸어보겠다고 방향을 잡아 현재까지도 연극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그는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과 무대에 서서 느끼는 관객들과의 교감은 본인에겐 다른 어떤 것을 할때보다 즐겁고 여운이 남아 연극배우의 길을 개척하고 계속 걸었던 것이 큰 행운이자 천직이었다고 소회를 전하기도 했다.
비록 올해로 75세 노령의 몸이 되었지만, 한국연극협회 수원시지부장을 맡게 된 이유도 “수원 연극계 후배가 제게 도움을 요청했고 저도 수원과 오랜 인연을 맺은 만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침체가 된 수원 연극의 활력을 불어넣고 싶지만, 연극인들이 연습하고 무대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과 지원책이 너무 부족해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관객들과 직접 교감 ‘진한 매력’에 평생 외길
연습실·무대공간 등 시 지원 태부족… 큰 어려움

 

 ▲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안녕하세요. 금년부터 다시 한국연극협회 수원시지부장을 맡게 된 정운봉입니다. 1948년생으로 올해 75세가 되었구요, 대구에서 교육공무원으로 근무했던 아버지와 전업주부셨던 어머니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대구에서 초·중·고를 졸업했습니다.
경력으로는 안양 영화예술학교(전문부) 졸업, 극단 촌벽 창단 (소극장 촌벽 개관),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 대행, 사)한국연극협회 경기도지회 고문 등으로 연극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평생을 거의 연극 하며 살았네요.

▲ 연극인의 길을 걷게 된 배경은.
고등학교 졸업 후 여러 번 재수를 해서 한국외대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3개월을 다니고 보니 제 적성이랑 전혀 맞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출석도 안하게 되고 계속해서 놀다 보니 “영화배우라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배우가 될 수 있는 학교가 어디있나’ 찾아보다가 현 안양예고의 전신인 안양영화예술학교를 알아내 입학하게 되었죠.
당시에는 전문대부와 고등부가 있었는데요. 바로 편·입학해서 공부를 했는데 한 달만에 후회했죠, ‘학교 잘못왔다’싶을 정도로요. 후회한 뒤로 계속해서 울다가 한 여자 동급생의 위로로 다시 일어섰고 연극 전공이신 오사량 선생님을 찾아가 “연극에 대한 공부를 특출나게 해볼테니 가르쳐달라”는 뉘앙스로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2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쯤, 신필립 영화감독에 눈에 들었지만 졸업하고 어떤 일을 해야할 지 몰라 신필립 영화감독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단역을 한번 해보니까 ‘당장 이 길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 연극에 도전해보고자 극단에 들어갔죠. 그리고 몇 년 후에 ‘실험극장’이라는 제일 탄탄한 극단에 들어가 ‘시집가는 날’ 등, 단역을 한 후, 에쿠스라는 작품을 통해서 주요한 보직을 맡아 열연해보니 관객들에게 받는 에너지에 매료되어 ‘이 길이 내 길이구나’ 생각하게 되었죠. 이것이 연극을 평생 업으로 삼게 된 계기였습니다.

▲ 한국연극협회 수원시지부에 대해 소개해달라.
수원 연극은 1961년에 태동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특히 수원을 넘어 경기도 극단의 효시였던 ‘화홍극회’를 창설한 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극단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수원 연극계가 융성해졌죠.
한국연극협회 수원시지부가 탄생한 시기는 1979년도로 천창봉 선생님이 초대 수원시지부 회장에 취임하신 것을 계기로 결성되었습니다. 초기 수원시지부를 필두로 한 연극은 이성용, 신진호라는 인물이 주도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이재인과 김성열이라는 인물들이 주도해 수원의 연극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었죠. 
특히 이재인이라는 인물은 공무원들을 상대하면서 지원을 얻어내는 것에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김성열이라는 인물은 지금도 매년 개최되고 있는 수원 연극제를 창시한 인물입니다. 현재는 제가 회장을 맡고 있고 18명의 회원이 남아있지만, 집을 사무실로 겸용하고 있는 처지에 놓여있을 만큼 어려운 상황이라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 여타 무대예술과는 다른 연극만의 매력이 있다면.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한 무대예술들이 등장했지만, 연극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이자 매력은 무대를 보러와 준 관객들과 그 어떤 예술보다도 빠르게 교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무대에 서고 연극이 진행될 때마다 관객들의 느낌이 계속 전달되고, 이것이 배우건 관객들이건 진한 여운으로 오래 남는다는 점입니다. 즉, 직접적인 소통이 된다는 것이죠. 이는 TV나 영화에선 느낄 수 없는 희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한번 연극의 매력을 알게 되면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 코로나로 인해 문화·예술계가 큰 타격을 입었는데 연극계의 속사정은.
코로나로 인해 문화·예술계가 정말 심대한 타격을 입었는데요. 사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본래 연극계는 매우 힘들고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었는데, 단적으로 제가 IMF 시기 즈음에 경기아트센터 옆에 촌벽소극장을 개관했었는데요. 아쉽게도 짧은 시간밖에 운영하지 못하고 망해버렸는데, 그때만큼, 아니 훨씬 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매우 어려웠습니다. 행사도 많이 축소되거나 잠정 중단되어 연극을 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금년에 수원시지부장에 취임해서 보니 예산이 3년 동안 전무했습니다. 이를 알고 수원시 공무원분들에게 사정한 끝에 시에서 예산을 만들어줬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명확했죠. 개인 차원에서 버티고는 있으나, 상황이 좋지 않아 속상합니다.

▲ 거리두기가 해제된 만큼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수원시 문화예술과장님과 계속해서 소통하며 지속적으로 건의한 것이 작은 연습공간과 사무실 공간을 시에서 마련해준다면 일반 시민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즐기는, 전문 배우들이 아닌 주민들이 직접 연극에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습니다.
또한, 전문 연극인들에게 필요한 행사들을 더 많이 만들어서 연극인들이 더 많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싶은 것이 제 바람입니다.
많은 예산도 중요하지만 저희에겐 연습 공간과 무대 공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뭐라도 되는 법이라서요.

▲ 연극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서울에서 활동할 때부터, 그리고 저를 따르는 후배들이 많아졌을 때도 대부분의 친구들에게 건넨 첫마디가 “연극 왜해?”였습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든 안하든 떠나는 친구들이 열에 아홉이지만, 남아있는 친구들이 연극에 대해 부정적인 소리를 해도 남아있는 것을 보면 연극인은 천직(天職)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 때 그때는 용기를 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꿈나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주위 눈치볼 것 없고 자기의 재능을 발견하고 있다면 그 재능을 키워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연극에 투자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면 최선을 다해 부딪혀보세요.

▲ 좌우명은.
‘하찮은 것이라도 의미가 있다’. ‘늙은 말에게도 지혜가 있다’는 노마지지(老馬之智)가 제 삶을 관통하는 사자성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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