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취재본부 김인종 본부장.
경기도취재본부 김인종 본부장.

【 수원 = 서울뉴스통신 】 김인종 기자 = 지난 87년 12월 1일, 우리나라 경제의 첨병이었던 이병철 회장의 장례가 끝 난지 열흘 만에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33년이 지난 2020년 10월 25일, 반만년(半萬年)‘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기업가며 진정한 ’오너‘였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78세를 일기로 ‘생(生)‘을 ’마감(磨勘)‘하며 수원에서 ’영면(永眠)‘했다. 그의 업적은 너무나 ’찬란(燦爛)‘해 따로 ’논(論)‘한다는 자체가 ’의미(意味)‘가 없다.

입체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집중과 선택’을 중시했던 그의 경영스타일처럼 그는 살아생전 경영에 관한 많은 명 ‘어록(語錄)’들을 남겼다.

지난 93년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 때 푸랑크푸르트에서 한 ‘신경영’에 대한 선언인 “나부터 변해야 한다.” “처자식 빼고 다 바꾸자.” “양 위주의 경영을 버리고 질 위주로 가자” “질만 높이면 양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된다.” 이어 2002년 6월 이건희 회장이 삼성 사장단 50여명에게 “21세기에는 탁월한 천재하나가 10만~2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경쟁의 시대, 지적 창조력의 시대이다.”라는 말을 던졌다. 부친인 이병철 회장처럼 이건희 회장도 인재를 중시했다.

인재를 중시하는 스타일은 같지만 둘의 스케일에는 차이가 있었다. 혹자들은 이병철 회장스타일이 계속 됐다면 오늘 날 세계 5위의 삼성그룹이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이병철 회장이 현장관리형이라면 이건희 회장은 ‘인간미’를 강조하는 조직관리 에다 명백하게 듣기(listening)형 리더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직접 주3~4회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챙기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소소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실무자들에게 맡기는 스타일이고 큰 줄기만 챙겼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이 ‘중소기업 형 리더’라면, 이건희 회장은 ‘대기업 형 리더’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건희 회장이 강조하는 ‘존경받는 기업’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전략경영이다. ‘기회경영’에 실패하면 또 다른 기회를 모색할 수 있지만, ‘전략경영’의 실패로 신망을 잃으면 회사의 생존조차 위험하다는 것이 이건희 회장의 생각이었다. 그의 사상에서 항상 사고하며 설계하는 자세가 엿보이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설계자, 기획자라는 단어를 좋아했다고 한다. 지난 95년 중국 장택민 국가주석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서 장 주석이 등소평을 중국의 ‘국가총설계자’라고 칭했을 때 충격 비슷한 감명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설계자(設計者)’인 이건희 회장의 말년 모습은 ‘등소평’과 많이 흡사해 보였다. 시대의 거물들은 서로 닮아가기도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이건희 회장이 그의 꿈과 야망을 제대로 펼친 곳이 수원이이다. 이건희 회장은 수원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현재 삼성은 글로벌 브랜드가치가 세계5위이다. 이런 사실은 삼성이 상상을 초월 할 정도의 초 우량기업이란 얘기다. 그리고 그 핵심기업은 삼성전자다.

이건희 회장은 60년대 중반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기위해선 전자산업이 가장 핵심이라고 보고 삼성전자공장 후보지로 부산과 수원 그리고 울주, 양산지역을 선정하고 조사와 검토를 위해 1968년 3월부터 7개월간 정밀 조사 및 타당성검사, 입지 여건 등 다각도로 검토한 끝에 수원을 최종 후보지로 낙점했다.

그리고 드디어 1969년 6·25가 끝난지 불과 15년 만에 미래 대한민국의 국가 경제 성장 동력의 기둥을 수원에 세운 것이다. 이렇게 이건희 회장의 웅대했던 초일류 일등 기업의 꿈이 삼성전자란 이름으로 수원에서 시작됐고 수원에서 완성된 것이다.

이건희 회장만큼 삼성전자를 사랑했던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삼성전자가 자리한 수원에 우리나라, 아니 세계적으로도 초일류 기업의 진정한 ‘오너’인 이건희 회장이 영면을 했다. 수원과 삼성은 참으로 ‘인연(因緣)’이 깊다. 삼성은 수원의 자랑이며 수원은 삼성의 ‘고향(故鄕)’이다.

저작권자 © 서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