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어려운 전통시장…시 차원에서 지원 시급”

강영우 수원시의회 의원이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했다.
강영우 수원시의회 의원이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했다.

【 경기·남부 = 서울뉴스통신 】 대담=김인종 편집위원장 / 글=김동초 대기자 = 모습이 깔끔하고 정갈하다. 마치 뉴스 앵커 같은 스타일. 하지만 출신과 성장과정은 소박하고 순수함이 넘치는 인물이다. 어렸을 적 고향 전북 남원군송동면에서 남원 시내로가 하숙을 하며 남원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아버님이 51세를 일기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눈앞이 캄캄했었다고 했다. 

강영우 의원은 어린 시절 별 어려움 없이 곱게 자랐고 아버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관계로 준비 없이 일찍 험난한 세상과 맞닥뜨리는 현실을 맞이했다. 당시 형님은 군 생활 중이었고 가족들 또한 대부분이 서울이나 외지에 나가 있어 큰 집에서 아버님 상을 치루며 철저하게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학업도 중단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맞이한 험난한 현실 속에서 고향을 떠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여러 행로를 거쳤다고 했다. 

가족이 있었지만 각자 삶의 형편이 달랐기에 거의 혼자라는 느낌으로 현실과 부대끼며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못 다한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검정고시를 거쳤고 그 후로도 여의치 않은 경제 사정으로 직업전문학교로 진학을 하며 일찍 생업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곳을 전전하다. 가족 중 일원이 터를 잡고 있었던 수원으로와 사업을 도우며 안착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후로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낙천적인 성격과 성실함으로 현실을 타개하며 오늘 날 125만 전국최고 지자체의 시의원을 역임하게 된 것이다. 강 의원은 2018년 조원1동과 연무·영화동을 지역구로 지방선거에 출마, 당당하게 의회에 입성했다. 그리고 활발한 조례활동을 통해 존재를 부각시키며 왕성하게 의정활동을 펼쳐온 것이다. 강 의원은 특유의 성실함과 진취적인 의정활동결과 2019년에는 사단법인 한국전문기자협회 창립24주년 기념 제10회 한국전문인 대상 시상식에서 ‘의정부문’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2020년에는 도시디자인 활성화관련 조례 대표발의 등 적극적인 의정활동과 함께 2021년에는 현행의 불합리한 ‘농기계 임대사업 조례개정’을 통해 임대 농기계 사용자를 시 관내에서 농지를 경작하는 농업인, 설립 7년 이내 영농조합법인, 농업회사법인 등으로 범위를 확대하는 근거를 마련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강 의원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거치며 경험한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몸소 체험했던 경험으로 복지의 절실함을 절감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복지분야’에 관해서도 정말 필요한 이들에게 복지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하며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제도권 안으로 옮기는 데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강 의원은 좀 더 나은 의정활동과 못 다한 학업을 성취하려 사이버 외국어대 ‘지방의회행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기도 하다.   
이런 열정으로 민초들의 팍팍한 삶의 현장을 누비며 그들과 함께 현실을 느끼며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발이 부르트도록 뛰고 있는 강 의원을 만나 진솔한 인터뷰를 시작했다. 

문. 의원님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 과정은.

저는 음력 1968년 8월 27일 전북남원 송동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가정이었고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송동초등학교를 나와 송동중학교를 거쳐 남원시내에 있던 남원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하숙방을 구해 등교생활을 하며 주말이면 송동고향집집으로 내려와 마을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이 큰 ‘수해(水害)’가 나던 해 논에 나가 물꼬를 정리하다 어깨가 탈골되며 크게 다치셨습니다. 그리고 차츰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하시더니 85년 뇌졸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던 날(51세)은 추석 이틀 전으로 남원하숙집에서 송동집으로 내려와 고향친구들과 냇가에서 천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달려와 “너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해 처음에는 믿을 수도 없었고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어머님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추밭에서 일을 하다 늦게 아버님을 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구급시기를 놓쳐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당시 형님은 군대에 있었고 큰 누님도 출가를 한 상태였습니다. 작은 누님 또한 당진에서 교편생활을 하셨던 관계로 아버님의 상을 치루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별 어려움이 없이 자라왔기에 작금의 현실이 너무 막막하고 무서웠습니다. 

문. 아버님의 서거 후 그 후 행보는.

아버님의 사망당시 경황이 없었던 상황으로 큰집에서 상을 치러주셨고 그 후 어머님은 돌이 채 안 된 외 손주를 돌보러 서울의 큰 누님 댁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큰아버님 집에서 아버님 1년 상을 치른 후 철저하게 홀로 남겨진 저는 남원에서의 고등학교 유학생활과 아버님의 부재로 인해 자퇴를 하고 서울에 거주하던 형님에게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형님은 제대 후 휴학을 하고 자취를 하며 ‘전과(轉科)’를 준비하던 중이었습니다. 저도 입시학원을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학원비와 생활비는 당진에서 교편생활을 하시던 작은 누님이 지원을 해주셨는데 얼마 후 연탄가스(일산화탄소)중독으로 휴직을 하시게 됨에 따라 생계가 막막해졌습니다. 

문. 혹독한 삶의 현실과 부딪혀 엄청나게 고생을 하셨다고 하시는데.

어린나이에 스스로 벌어서 먹고 공부하기는 정말 어려운 현실이었습니다. 결국 숙식이 제공되는 ‘신문배달 업소’에 취직, 지하철에서 신문을 팔며 ‘주경야독(晝耕夜讀)’ 끝에 1988년 8월 검정고시에 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규대학 진학여건이 안 돼, 대전시 동구에 있던 ‘직업전문학교’기숙사로 들어가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전기과’를 택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당시는 ‘전기’를 전공하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고 저 역시 그 말을 굳게 믿고 ‘전기기능사1급’과 ‘전기기사’ ‘전기공사기사’까지 자격증을 취득, 전기공사에 관해서는 설계·감리까지 진행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1989년도, 대림건설에 입사를 하며 정식으로 기업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6개월을 근무 한 후 1992년 4월 군에 입대, 1995년 초 제대를 하게 됩니다. 

문. 군 복무 후의 사회생활은 어떻게 전개되셨는지.

 제대 후 저는 수원으로 내려와 누님과 매형이 운영하는 인테리어 업체에서 전기 분야를 맡아 함께 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누님은 수원의 중동사거리와 매교동 등 4곳에서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고 계셨기에 나름 규모가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저도 열심히 누님을 도와 8년 정도 일을 배운 후 1999년 경 고등동 ‘쌍우물’에서 ‘우신광고’란 상호로 개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10년 정도 운영을 하다 고등동 일대가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정리가 되면서 교육청사거리로 사업장소를 옮겨 2010년에 ‘우신애드컴’으로 재 오픈하여 운영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경 ‘홍익디자인협동조합(전국최초 직원도 조합원)’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사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 결과 2015년 ‘협동조합의 날’ 기념식행사 때 협동조합부문기획재정부장관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수원에는 도시미관을 해치는 불법현수막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단형게시대’를 개발, 전국최초 특허를 신청해 조달청 등록을 마쳤습니다. 

문. 지역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라면.

저는 1990년대 김대중 대통령 아드님이 조직한 ‘연청’이라는 곳에서 활동을 했던 경력이 있습니다. 지역에서는 국제와이즈맨에서 활동하면서 독거노인 돌봄, 사랑의 집 고쳐주기, 동 봉사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하였고 영화동에서 동협의회장직을 수행, 지역 현실정치와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자연스럽게 지역구 시의원제의가 들어왔고 저는 경선에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수원‘가’선거구인 조원1동과 영화동·연무동을 지역구로 출마 당선되어 드디어 정치제도권 안으로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문.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지역주민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과 지역현안은.

코로나사태로 지역주민들이 모두들 힘든 시기를 맞고 있지만 그 중에서 전통시장들이 특히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우리지역구인 조원·연무·거북시장 등이 타격이 큽니다. 판매하는 상품의 종류도 적고 시스템 등이 열악해 거의 직격탄을 맞고 있습니다. 시 차원에서의 지원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지역주민 여러분들도 어려운 위기 일수록 서로 힘을 합쳐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여러분과 함께 최선을 다해 힘껏 뛰겠습니다. 모두 힘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역현안으로는 첫째, 영화동 영화어린이 공원 지하주차장건립건과 둘째, 연무동 용현저수지 방화수리정에서 광교공원까지 이어지는 데큰(산책로)조성 건, 그리고 셋째, 조원1동 복합문화센터 및 공영주차장건립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성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문. 의원님의 가정사와 ‘좌우명’이 있으시다면.

저는 중고등학교 동창인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친구 여동생을 보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 앳된 모습에서 이젠 어엿한 숙녀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래서 설레는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했고 친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결혼에 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1995년 약혼을 한 후 1년 후인 1996년 11월 10일 결혼식을 올리고 수원 영화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아내에게는 고생만 시킨 지난 세월동안 항상 묵묵하게 제게 힘이 되어주었기에 늘 고맙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끝까지 함께 인생의 동반자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자녀는 25세 된 아들과 18세 된 딸이 하나 씩 있습니다. 큰 아들은 제대 후 가천대에서 도시계획과 4학년에 복학을 했고 작은 딸아이는 고등학교2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모두 건강하고 건전하게 자라주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남매사이의 우애도 돈독해 정말 화목한 가정입니다. 그리고 제 좌우명은 “웃고 살자”입니다. 항상 미소를 띠면 모든 일이 즐겁고 잘 풀린다고 합니다.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지역구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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