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 전시실에선 ‘실버토크’… 책만 보는 곳 편견 버려

▲ 서울도서관 앞마당에서는 헌책을 사고파는 ‘한 평 자리 책시장’ 행사가 열렸다.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모두 축제에 참여한 듯 즐거워 보였다.

서울시 옛청사 건물에 들어선 서울도서관은 이제 단순히 책만 읽는 곳이 아니라‘밤의 도서관’에서 책과 영화와 여행이 만났을 때를 이야기하며 삶의 여유를 느끼는 휴식공간 이기도하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야만 볼 수 있는 현대 미술전 ‘실버토크’도 관람할 수 있다. 청년은 노인에 대해, 노인들은 젊은이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며 세대 간의 소통이 이뤄지기도 한다.

집에 쌓여가는 골칫덩이 헌책을 들고 나와 ‘한 평 자리 책시장’에서 파는 재미와 사람 만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이뤄지는 곳, 바로 서울도서관이다. 도서관의 얼굴이 다양해졌다. 단순히 책을 읽고 빌리던 공간에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다채로워진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옛 서울시청사 건물에서 서울의 대표 도서관으로 변신한 서울도서관에서는 지난 4월 13일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도서관 앞마당에서는 ‘한 평 자리 시민 책시장’이란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책을 팔러 온 시민들과 구경 나온 시민들로 북적이며 활기를 띄었다. 사전에 신청한 개인, 가족, 단체 등의 50개 팀이 참여해 가지고 나온 쇼핑카트 한 대 분량의 헌책을 팔고 있었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 나왔다는 김인협(31세) 씨는 예쁜 간판과 책 한 권을 사면 페이스페인팅을 해준다는 호객 행위로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어떤 팀은 카트 위에 노란 우산을 달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자신이 보던 책들을 들고 나와 다양한 방법으로 시선을 끌며 팔고 있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책을 팔아 이익을 남기겠다는 생각보다는 모두들 축제에 참여한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우연히 근처에 왔다가 들렀는데 책들이 많아 좋네요. 저렴한 금액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좋고요. 그런데 어린이 책은 다양하지 않아서 좀 아쉬워요.” 딸과 함께 왔다는 주부 도진숙(45세) 씨는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책이나 체험활동 같은 행사가 없는 것은 조금 아쉽다고 덧붙였다.

▲ 행사에 참가한 한 시민이 예쁜 간판과 페이스페인팅 서비스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저희는 책을 팔지 않습니다.”
쇼핑카트를 노란 우산으로 장식한 ‘곳곳 프로젝트 그룹’ 회원들은 책을 팔지 않았다. 대신 원하는 이들에게 무료로 대여해준다. 가지고 나온 책은 전부 기증받은 것들이다. 근처 공원에서 읽거나 원하면 집으로 빌려가기도 한다. 대신 책을 읽은 사람들은 ‘한 줄짜리 독후감’을 남겨야 한다.

모임 회원인 이경래(32세·공간디자이너) 씨는 사람들과 좋은 문화를 공유하자는 취지로 지난해 여름부터 ‘수레도서관’이란 것을 시작했다. 책을 읽고 다른 이가 써놓은 한 줄 독후감을 보면서 ‘남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구나’ 생각해보는 소통의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 나중에는 한 줄로 남겨놓은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 전시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천 원에 구입한 수필집을 한 권 들고 도서관 앞마당 잔디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소풍을 나온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북적이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다.

▲ ‘수레도서관’을 운영 중인 이경래 씨가 친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실버-이야기하다, 청년-감각하다’라는 주제로 ‘실버토크’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떠들썩한 앞마당과는 달리 전시장에는 서너 명씩 들르며 차분하게 관람을 하고 나갔다. 이번 전시는 청년 작가들이 어르신 네 명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글을 배우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정성스레 연습하며 써내려간 노트 위에 안경 모양의 브로치와 이름이 새겨진 진주 목걸이 작품이 놓여있었다. 박송희 작가의 ‘내 이름은...’과 ‘빛나는 열정’이란 작품이다. 자신의 이름 한 자 한 자를 배워가며 새로운 인생을 찾고자 하는 어르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건욱 작가의 ‘내 몸은 소중해’란 단편 영화도 인상적이었다. 어린이들에게 평소 인형극을 통해 성교육과 유괴 예방 교육을 하던 할머니 극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단편영화로 실제로 할머니들이 목소리 녹음에도 참여했다.

▲ 한글을 배워 새로운 인생을 찾고자 하는 어르신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다른 한편에는 검지 손가락보다 작은 노인들이 비누, 황토와 숯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축 처진 뱃살과 입꼬리가 내려간 기운 없는 표정이 ‘어디에나 있거나, 아무데도 없는’ 노인들의 존재감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이 밖에도 그래픽디자인, 의상디자인, 가구, 현대 및 전통공예, 사진 등의 매체를 통해 청년의 감각으로 실버 세대의 잔잔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전시를 보려면 갤러리나 미술관으로 가야하는데 도서관에서 전시가 열리니 색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좋네요.” 도서관에 왔다가 우연히 전시를 보게 됐다는 송승현(28세·직장인) 씨는 안경희 작가의 사진 작품이 인상깊었다고 한다. 손때 묻은 책 사진을 통해 ‘시니어가 재산이다’란 말을 실감하게 됐다고 한다.

작품 옆에 적어놓은 설명을 꼼꼼히 읽으며 혼자서 조용히 관람하는 어르신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실버와 청년의 소통이 주제인 만큼 어르신은 어르신들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 노인들의 존재감을 표현한 작품 ‘어디에나 있거나, 아무 데도 없는’

전시 설명을 담당하는 도슨트 양초롱(25세) 씨는 이번 전시의 기획이 신선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실버와 청년 간의 소통의 문제뿐 아니라 다양한 문제들도 이런 방식으로 이슈화 시키면 좋겠다는 반응들이 많았다고 한다.

작품 속의 주인공이면서, 관람객들에게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실버토크 연사 송선자(75세) 할머니에게 이번 전시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우리는 격동기를 겪은 세대라 젊은이들은 우리를 잘 이해 못해요. 우리 이야기들을 젊은이들이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그런데 이번 전시가 젊은이들과 소통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속적으로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송선자 할머니는 고령층 대상 언론사에서 활동하는 기자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경리일로 회사생활을 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그만두게 됐다. 늦은 나이지만 가슴 속에 고이 간직했던 젊은 시절의 꿈인 기자가 됐고, 삶이 활기차지고, 인간관계도 다양해졌다. 책도 보고 인터넷 검색도 하며 공부를 하게 됐다. 최근에 딴 한글 컴퓨터 자격증 덕분에 ‘용기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며 즐거워했다.

▲ 실버토크 연사 송선자 할머니가 골판지로 만든 자신의 초상화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작가들은 송선자 할머니와 만나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의 삶을 ‘청춘오작교’라는 잡지로 만들었다. 정예지라는 작가는 노인의 주름을 표현하기 위해 골판지를 재료로 사용했다. 그 주름 안에는 할머니의 일대기가 깨알같이 적혀있다. 그 이야기들이 바로 송선자 할머니의 얼굴이 됐다.

전시를 둘러보며 어르신들의 경험과 추억, 그리고 시대에 맞춰 스스로의 역할을 만들어 나가는 우리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봤다. 실버 세대와 청년 세대는 그곳에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도서관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이용하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문화행사는 다양한 계층이 함께 향유할 수 있다. 이제 도서관하면 수많은 책이 있는 곳 외에도 볼거리가 있는 곳, 만남과 소통이 있는 곳을 떠올리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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