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서>

어쩐지 하델과 키드라 해적들이 지구를 제 집 앞마당 드나들듯하며 마음 놓고 전쟁을 벌여도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 이해되었다.
“이 번에는 카니스 의장님입니다.”
“알았어.” 
시리우스는 화상을 이동했다.
“수고가 많으시오. 지금 1급 기밀 표시를 운반하러 아틀란티스 박물관장이 카노푸스와 함께 지구로 가고 있을 것이오. 협조 부탁하오.”
“카노푸스가 별들의 회의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자리를 비우니 의장님 업무가 한동안 방학을 맞이하겠군요.”
“하핫, 교수가 휘두르는 비판의 칼날이 하도 깊이 파고들어 내 가슴이 몹시 아프오.” 
뜨끔했는지 카니스는 멋쩍은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다.
“우주 군단 출동 명령서를 재가 받으러 가야 하오. 그럼 바빠서 실례하겠소.” 
화상 미팅이 종료된 후 시리우스는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두 주먹을 쥔 채 서 있었다.
“지금 명령서를 재가 받으러 간다고? 호호호.”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 제쳤다. 카니스가 별들의 의장이 되는데 협조했던 지난 일이 후회막급이었던 것이다. 
“교수 이모, 뭐가 그렇게 기뻐?” 
제 꼬리를 물어보려고 뱅글뱅글 돌던 스노가 뛰어왔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범진 스님은 밤새 한숨도 잠을 못 이루었다. 여러 날 째 은교에게 기억력을 되살리기 위해 혹독할 만큼 참선을 시켜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눈빛보석이라는 아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집착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은교는 지칠 대로 지치고 범진도 지쳐가고 있었다. 
‘마지막 방법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은교가 잘 견뎌 주어야 할 텐데.’ 
범진은 아침 공양을 마치자 은교에게 목욕을 깨끗이 하게 한 다음 명상의 시간을 다른 날 보다 길게 가지게 했다. 마음의 시공간을 넓혀 주려는 것이었다.
“오늘은 화두가 아니라 마음속 여행을 해 보자꾸나.” 
범진 스님이 다른 날과 다르게 엄하지 않고 편안하게 이끌어 은교의 마음도 모처럼 풀밭에 눕는 휴식처럼 느껴졌다.
“눈을 감아 보렴.”
“예.”
“조금 전에는 무엇을 했지?”
“명상을 했어요.”
“더 조금 전에는?”
“목욕을 했어요.”
“더 조금 전에는?”
“아침 공양을 했어요.”
“더 조금 전에는?”
“예불을 드렸어요.”
“더 조금 전에는?”
“잠을 잤어요.”
“더 조금 전에는?”
“여러 날 째 화두를 깨우치려 했어요.”
“더 조금 전에는?”
“엄마가 다녀가셨어요.”
“더 조금 전에는?”
“눈빛보석이 왔었어요.”
“흐음, 더 조금 전에는?”
“눈빛보석과 합목 앞에서 자주 만났어요.”
“더 조금 전에는?”
“눈빛보석과 비 내리는 날 우산 속에 함께 있었어요.”
“더 조금 전에는?”
“눈빛보석에게 조약돌을 주고 나도 한 개 가졌어요.”
“더 조금 전에는?”
“눈빛보석이 눈보라 치는 추운 날 흰 목도리를 나에게 둘러 주었어요.”
“더 조금 전에는?” 은교가 힘이 드는지 숨을 한 번 들이 쉬었다.
“음, 감기 몸살로 힘들었어요.”
“흠, 더 조금 전에는?”
“엄마랑 늦게까지 빨래를 했어요.”
“더 조금 전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더 조금 전에는?”
“마당에서 뛰어 놀다 넘어졌어요.” 
은교의 얼굴에서 땀이 송글송글 배어나 흐르고 있는데 범진 스님은 닦아 주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기억을 멈추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 조금 전에는?”
“내 친구 베가의 말이 슬피 울며 하늘로 날아갔어요.”
“더 조금 전에는?”
“갓난아기였는데 ‘행복한 집’ 문 앞에 놓여 있었어요.”
“더 조금 전에는?”
“아, 아. 모르겠어요.” 
은교는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았다.
“힘 내. 그것을 알아내야 하느니라.”
“아아, 문이 열리지 않아요. 스님, 도와주세요.” 
은교가 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생과 현생의 사이의 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은교는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으로 말하면 어머니 뱃속에 임신되기 전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자신의 전생으로 가는 문을 열려는 것이다.
“너만 열 수 있는 문이니라. 온힘을 다해 밀고 들어가거라.”
“아악!” 
은교는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열었구나! 어서 말해 보렴.” 
범진 스님은 이제 됐구나 싶은지 은교 가까이 조심스럽게 다가앉았다.
“태양훈육관장이 이름을 묻기에 데네브라고 대답했어요.”
“더 조금 전에는?”
“기드로온 왕자와 함께 신비의 물을 마신 다음 손잡고 잠들었어요.”
“더 조금 전에는?”
“왕자의 아버지 알마크 대총독이 나를 기드로온에게서 떼어 놓으려 했어요.”
“더 조금 전에는?”
“나는 기드로온 왕자의 몸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요.” 
“더 조금 전에는?”
“기드로온 왕자와 한 쌍의 흰 물고기처럼 별들 사이를 헤엄쳐 다녔어요.”
“더 조금 전에는?”
“기드로온과 나는 한 몸이고 한 영혼이었어요.”
“너는 누구지?”
“데네브예요.”
“기드로온은 누구지?”
“눈빛보석, 눈빛보석이예요!” 
눈빛보석을 외치더니 은교는 눈을 번쩍 뜨고 두리번거리며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뛰쳐나갔다.
“눈빛보석, 어디 있어?” 
맨발로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뛰어다니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굴에는 힘겨웠던지 굵은 눈물이 또르르 굴러 내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너를 너무 고생시켰구나. 이제 괜찮아. 괜찮아.” 
범진 스님은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은교를 안고 가엾어 하며 눈물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뜰마루
하델과 키드라가 직접 지휘하는 수원성 전투는 재개되자마자 치열했다.
“누구든지 키드라를 잡아오면 2인자 자리를 줄 것이다!” 
하델은 키드라를 잡는데 포상을 내걸었다. 키드라가 하델을 화나게 하는 데는 목적이 있었다. 
“여섯그만이 정신이 들었는지 확인해 봐.”
“예, 어느 정도 거동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철창에 갇힌 여섯그만을 살펴본 알박이가 돌아와서 보고했다.
“알박아, 너 이번에 실수하면 여섯그만과 함께 팔달산에 묻어버릴 테니까 반드시 납치해 와.”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알박이는 1개 대대 병력을 이끌고 팔달산 뒤쪽으로 돌아서 동쪽으로 행군했다. 알박이가 여섯그만을 앞세워 빠져나가는 동안 키드라는 모든 화력을 동원하여 하델을 향해 쏘아 댔다.
“저 시키가 미쳤나, 오늘밤에 끝장 보자 이거지? 그래 함 붙자. 아그들아, 저 놈들 똥줄 타게 사정없이 퍼 부어라!” 
하델은 지금 기드로온 왕자를 납치하는 것에는 생각이 없고 자기를 약 올린 키드라 진영을 초토화시키는 것에만 마음이 쏠려 있었다.
“또스또스.”
“하델 아우냐? 나 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키드라 형님이시다.” 
키드라의 한층 점잖아진 듯한 목소리였다.
“왜 또 전화하고 지랄이야. 입에다 수류탄 물리기 전에 끊어 이 자식아!”
“거참, 성질머리 하고는 쯧쯧. 똥돼지에게 여물로 줘도 퉤퉤 하겠다.” 
키드라가 화력을 쏟아 붓고 약까지 올려가며 시간 끄는 것을 저돌적인 하델은 조금도 낌새채지 못하고 맞받아치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너 아무리 봐도 두목감은 아닌 거 같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데 너를 두고 하는 거 같다.” 
키드라가 한 번 더 하델의 부아를 돋우었다.
“후아, 누가 제발 저 놈 혓바닥 좀 뽑아버려!” 
하델은 분을 못 참아 통화하던 수화기를 북문 누각을 향해 던져버렸다.
“연락해 봐.”
“방금 전투 지역을 벗어나 죽전 고개를 넘었다고 합니다.”
“시야를 벗어났군.” 
키드라는 자신이 직접 납치하려고 지구에 내려왔는데 예기치 않게 하델이 내려와서 작전을 바꾼 것이다. 자신이 수원성에 없는 것을 알게 되면 하델에게 의심받아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죽전 고개를 넘어간 알박이는 쉬지 않고 달려 오포에 이르고 있었다.
“헉헉, 다리에 매어 놓은 쇠사슬 좀 풀어 주슈.” 
여섯그만은 고통스러워하며 사정을 했다.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내 기분 지금 어떤 건지 가르쳐 줄까? 너를 축구공 차듯 몰고 가고 싶은데 참는 거야.” 
알박이가 눈알을 덜렁거리며 말하자 여섯그만은 더 이상 말도 못하고 울상이 되어 앞장섰다.
한편, ‘행복한 집’에서는 마리아 원장이 꿈을 꾸고 있었다.
“가면 안 돼, 은교야!” 
원장이 자다 깼다. 꿈속에서 은교가 흰말처럼 생긴 이마에 뿔 달린 동물을 타고 훨훨 날아간 것이다. 
“별 이상한 꿈도 다 많지. 이 세상에는 그렇게 생긴 말이 없으니까 개꿈을 꾼 거야.” 
원장은 꿈자리가 뒤숭숭하지만 무시하고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엎치락뒤치락하다 일어나 새벽부터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만들었다. 날이 밝자 은교가 좋아하는 전과 동그랑땡을 싸서 미니버스에 실었다.
“일찍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애들 식사 좀 챙기렴.” 
원장은 은혜와 지수에게 부탁하고 차에 올라 부지런히 관음사를 향해 운전했다. 오늘따라 은교 만나러 가는 길이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좋으면서 불안한 마음이 자꾸 뒤섞이는 것이었다. 꿈속 일 때문에 그러나 싶어 뿌리치려고 몇 번씩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이제 다 왔다.” 
절마당을 비질하고 있는 범진의 모습이 보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알고 달려왔나?” 
절 마당에 차를 세우고 음식 보자기를 내려놓는 마리아를 범진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지 못하게 하더니 오늘은 잘 왔다고 맞아 준 것이다.
“엄마!” 
부엌에서 은교가 눈물부터 앞세우며 달려왔다.
“은교야, 이제 알아보는 거니? 아이구 내 새끼야.” 
마리아와 은교는 한데 엉켜 한동안 떨어질 줄 모르고 울기만 했다.
“자자, 그만 하고 아침 공양하러 들어가지?” 
범진이 두 사람을 밀어가며 공양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엄마, 그동안 기억 못해서 미안해요.”
“에이구, 이 자식아. 이제 에미 애간장 그만 태워.” 
마리아는 웃음으로 식사를 하면서도 연신 눈물 콧물을 찍느라 훌쩍 댔다.
“엄마, 이제 그만 울어요. 자꾸 울면 나 노래 불러요.”
“알았다, 알았어.” 
아침 공양을 마친 세 사람은 나란히 뜰마루에 앉아 지나간 이야기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저 가시내란 말이지?”
“맞습니다요.” 
숲 속에는 새벽에 도착한 키드라의 부하들이 숨어서 절간을 살피고 있었다. 
“조금 더 기다리면 미니버스가 떠나고 중은 법당 안으로 들어가게 됩지요. 그러면 가시내 혼자 심부름하느라 마당을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요.”

<다음호에 계속>

 

이중삼 작가 
이중삼 작가 

충북 충주 살미 출생. 시(詩)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원문인협회 회원. 시집= '아스팔트 위의 노루' '세상에 여자가 그 사람뿐이냐고 물으면' '꽃대' 3권 출간, 소설= '하늘바라기' '노크' 2권 출간, 우화= '2600년 후 이솝우화 그 다음 이야기' 4권 출간, 어른동화= '시간의 지평선 너머' 대서사 장편 탈고, 감성 스케치= '아주 사소한 것들' '그리움의 빈집' '예술의 하울링' 등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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