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서>
“어디로 가려고?” 
백구는 안 된다며 눈빛보석을 막아서듯 말했다.
“네가 이러면 안 되잖아.” 
눈빛보석은 백구의 목을 껴안고 눈물을 뿌렸다.
“가지 마!” 
모두 눈빛보석에게 달라붙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눈빛보석, 꼭 다시 올 거지?” 
노랑가슴이 자신도 눈물 흘리며 날개로 눈빛보석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응.”
“약속해!” 
이번에는 모두 눈빛보석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휴, 그리고 북수동 성당에 있는 그냥친구를 나처럼 대해 줘.” 
눈빛보석은 한숨을 길게 쉰 다음 팔달문 대청마루에서 계단을 내려섰다. 친구들이 따라 나오려 하자 그러지 말라고 대청마루로 밀어 넣고 북문 방향으로 혼자 걸어갔다.
‘은교를 납치해 간 것은 하델 해적일 거야.’ 
눈빛보석이 그렇게 판단한 것은 애꾸눈 수리부엉이가 키드라를 속였기 때문에 살려면 하델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델에게 은교를 납치할 수 있도록 정보를 주었다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눈빛보석은 키드라 진영을 피해서 하델 진영으로 갔다.
“너는 누구냐?” 
보초들이 막아섰다.
“기드로온 왕자다.” 
주위의 해적들이 모두 눈빛보석을 바라보았다.
“진짜 맞아?”
“왕자가 제발로 걸어온다는 게 말이 돼?”
“예끼, 이놈아. 어른 놀리면 못 써.” 
보초들은 믿지 않고 눈빛보석에게 알밤을 주며 쫓아버리려 했다.
“진짜라니까!” 
눈빛보석은 외쳤다. 그러자 해적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때 왕눈깔도 날아왔다.
“잡아!”
“잡아? 그래 잡았다.”
“멍청아, 누가 나를 잡으래. 저 애를 잡으란 말이다!” 
다들 멀뚱거리며 왕눈깔과 눈빛보석을 쳐다볼 뿐이었다.
“저 아이가 눈빛보석 아니 기드로온 왕자란 말이야!” 
왕눈깔이 악을 쓰며 소리질렀다.
“그래?” 
그제서야 해적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서로 잡겠다고 난리를 쳐 눈빛보석의 옷이 여기저기 찢겨나갔다.
“모두 물러서!” 
가까운 곳에서 키드라 해적과 대치중이던 삐쭉이가 보고를 받고 달려와 부하들을 떼어 놓았다.
“다치지 않게 잘 묶어!” 
눈빛보석은 하델에게 끌려갔다.
“으하하핫, 으하하하핫!” 
하델은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어 젖혔다.
“어서 오셔, 어서 오시게.”
“은교를 풀어 줘!” 
하델이 반기는 것과는 달리 눈빛보석은 그 말부터 쏘아붙였다.
“은교라니? 어이, 누가 은교라는 놈을 잡아왔나?”
“아뇨!” 순간 눈빛보석이 당황하는 얼굴을 했다.
“얘야, 아니 왕자님, 뭐 속이 거북하신가? 콜라라도 한 모금 줄까?” 
하델은 콜라를 병째로 벌컥벌컥 마시며 싱글벙글이다.
“정말 은교가 여기 없단 말이지?”
“그렇다니까.” 눈빛보석은 털썩 주저앉았다.
“안 되지, 안 돼. 너는 조금도 흠집나면 안 되는 귀하신 몸이란다.” 
하델은 의자에서 내려와 눈빛보석을 보물 다루듯 했다. 다리에 채워진 쇠사슬은 넉넉하게 늘여 주고, 손 뒤로 묶었던 줄은 풀어 주었다.
‘아뿔사, 부엉이 털이 반쯤 빠졌다는 범진 스님의 말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눈빛보석은 풀어진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호오 호오, 자해하지 마라. 너는 우주 최고의 상품이거든.” 
하델은 마치 시녀가 된 것처럼 눈빛보석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그렇다면 은교는 지금 키드라에게 잡혀 있다는 결론이다. 어떻게 구한다? 눈빛보석은 자신이 하델에게 잡힌 것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은교 걱정뿐이었다. 
‘나를 좋아해 준 죄밖에 없는데.’ 
눈빛보석은 은교를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해적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잘해 주는 것이 너를 불행하게 하고 있구나.

■ 어린 숙녀
관음사와 수원성 사이를 두 우주 전사의 비행선과 스노가 수없이 오가기만 할 뿐  납치자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벌써 팔달산 동굴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잘 보호해라. 손끝 하나라도 스치는 놈은 손모가지들 작두로 잘라버린다.” 
키드라는 부하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워낙 험악한 놈들뿐이니 아름다운 모습인 은교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를 보내 줘요!”
“어디로? 기드로온 왕자에게?” 
은교가 소리치자 키드라가 가까이 다가와서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 염려 마라. 기드로온이 너를 구하러 오지 않겠니? 우리는 왕자님을 모시러 온 신사 중의 신사란다.”
“나쁜 놈들! 기드로온 왕자는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아.” 
은교는 눈빛보석이 자신을 구하러 오지 못하게 하려고 생각을 바꾼 것이다. 
“어째서지?”
“내 이름은 은교이고 나는 기드로온 왕자가 누군인지 모르거든요.”
“여섯그만!” 
은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키드라는 애꾸눈 수리부엉이를 불렀다.
“이 새끼, 저 가시내는 데네브가 아니라잖아!” 
퍽! 여섯그만이 나타나자 발길로 가슴팍을 차버렸다.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요.”
“누구 말이 맞는 거야?” 
키드라도 생각을 해 보았다. 여섯그만이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이 가시내가 데네브인 것이 맞다. 기드로온을 위해서 자신을 숨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왕자를 지키려는 모습이 철옹성 같았다.
“나에게는 이 가시내 같은 부하가 한 놈도 없냐?” 
키드라는 해적왕이지만 나름대로 교양을 따지려 하는 심성도 있었다.
“너 내 부하해라. 그럼 부두목 시켜 줄게.” 
은교에게 점잖게 말하며 힐끗 알박이를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알박이는 소변을 오래 참은 소심한 남자처럼 다리를 꼬며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되겠다, 알박이놈 눈알 튀어나오는 거 보니까 너한테 무슨 해코지할지 모르겠다.” 
키드라가 그렇게 말하자 늘 부두목으로 승진하고 싶어 안달이던 알박이의 자세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키드라는 은교를 가운데 두고 왔다 갔다 하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알박아, 눈만 뺐다 넣었다 하지 말고 좋은 생각 좀 넣었다 뺐다 해 봐.”
“아, 수원성 벽마다 저 가시내의 사진을 크게 붙여놓으면 기드로온 왕자가 여기로 찾아올 게 뻔합죠.”
“멍청한 놈아!” 
탁! 키드라는 작전참모 알박이의 뒷머리를 지난번처럼 후려갈겼다.
“아쿠쿠.” 
떼구르르 알박이의 두 눈알이 튀어 나오며 바닥에 떨어져 한 개는 은교의 발 아래로 또 한 개는 키드라의 의자 밑으로 굴러갔다.
“어머.” 
은교는 너무나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사이 알박이는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눈알을 찾아 도로 넣었다.
“미안미안, 예쁜 숙녀를 놀라게 했군.” 
키드라는 해적왕에 어울리지 않게 은교의 놀란 마음을 달래 주었다.
“동네방네 홍보를 하면 기드로온 왕자가 그것을 보고 이곳으로 오다가 어떻게 된다?”
“하델에게 납치됩죠.” 
키드라는 알박이의 대답을 들으며 또 한 번 뒤통수를 후려갈기려다 은교를 돌아보며 싱긋 웃어주고 손을 내려놓았다.
“아프게 묶지 말고, 예쁜 의자에 앉혀 두고 잘 지켜.” 
키드라는 은교를 감시하도록 부하들에게 지시하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좋은 묘안이 떠오르지 않자, 산책하면서 전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장대비처럼 퍼붓던 총성도 멎고 아군이나 적군이나 게으름 피고 있었다. 햇살 좋은 날 침팬지들이 봄 소풍 나온 것처럼 이리저리 뒹굴며 이들 잡기 바빴다.
“하델 놈은 기드로온 왕자를 납치하러 온 거야, 나랑 얼러 보자고 지구에 내려온 거야? 단순 무식한 놈.” 
키드라는 성곽 아래 진을 치고 있는 하델 본부를 내려다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하하하!”
그때, 성곽 아래에서 하델이 반쯤 비워진 럼주 병을 들고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빈 쭉정이 놈!”
성곽 위에서 내려다보는 키드라를 올려다보며, 삼국지의 장비 같은 모습으로 껄껄대며 호통쳤다.

■ 우주의 푸른 눈동자
“은교를 구해 줘. 그러지 않으면 나를 통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거야.” 
눈빛보석은 하델에게 요구했다.
“햐아, 왕자라 역시 다르네. 해적 보고 좋은 일을 하라니 말이 되니?” 
하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쁜 일은 순간적인 쾌락처럼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끈적끈적하게 썩는 비극의 액체 같아. 하면 할수록 그 속으로 자신을 자꾸 밀어 넣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거야. 좋은 일 한 번 해 봐. 내 안에서 전멸한 줄 알았던 물속 같은 내 영혼이 맑은 눈동자처럼 나를 보고 있을 거야. 순백의 비둘기처럼 어딘가에서 한 마리 정도 날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거야.”
“어이 왕자, 나는 공자 할배가 아니야. 해적 상도의에 어긋나는 짓을 나보고 하라는 건데, 내가 은교라는 아이를 구해 주지 않으면 어떡할래?”
 하델은 껌 한 통을 다 넣고 씹는지 입 안 가득 질겅거리며 퉁명스럽게 내뱉듯 말했다.
“두목이 내 아버지와 협상을 해도 소용없을 거야. 나는 해적들 속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고 너희가 결코 성공할 수 없게 할 거니까.”
“미치겠다. 이거 똥바가지 쓴 기분이네?” 
하델은 천불이 나는지 머리에 찬물을 확 끼얹고 정신 차리려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니까 은교를 구해 줘.” 
“고매하시고 고상하신 왕자야, 나 좀 살려 주라. 해적들을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가로채기는 있어도 이미 가져간 것은 빼앗지 않는 것이 우리네 법도야. 네 말 들어주면 나 밥줄 끊어져. 해적들 세계에서 퇴출된다 이 말씀이야.” 
눈빛보석의 똑같은 말을 반론으로 하델이 길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 밑바닥에는 앙금처럼 깔려 있는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방증이다. 그것을 안 눈빛보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하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좀 더 나은 결과를 얻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 같은 것이었다.
“그래, 구해 주면 나에게 무엇을 더 줄 건데?”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흘렀다(모든 것을 불같이 끝내버리는 급한 성격의 하델에게 이렇게 지루하고 긴 대화는 없었다.). 하델이 먼저 말문을 연 것이다.
“없어.” 
눈빛보석의 이 한 마디는 하델과 3인자부터 19인자가 주목하고 있는 좌중을 향해  단번에 끼얹은 찬물이나 다름없었다. 엄청나게 큰 물동이로.
“없다고?” 
하델은 도박하다시피 눈빛보석에게 잔뜩 기대하며 물어본 것인데, 경악할 대답을 들은 것이다.
“손에 쥐어 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내가 우주로 돌아가면 너희들과 우주가 소통할 수 있는 다리를 놓으려고 진심으로 노력할게.”
“후아, 덥다, 더버라. 누가 얼음물 좀 퍼와!” 
얼음물을 퍼다 주자, 벌컥벌컥 두 그릇은 족히 들이키고 말을 다시 이었다.
“기드로온, 어린 건 알겠는데 너 순진한 거니, 바보니? 그걸 흥정이라고 해?”
“미안해, 네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나에게는 없어.” 
눈빛보석에게서 눈물 한 방울이 또록 하고 굴러 떨어졌다. 
“에이!” 
하델이 벌떡 일어나 앉아 있던 의자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기집애도 아니고 눈물은.” 
그는 구시렁거리더니 큰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따라오지 마, 이 새끼야!” 
3인자가 동행하려다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이중삼 작가 
이중삼 작가 

충북 충주 살미 출생. 시(詩)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원문인협회 회원. 시집= '아스팔트 위의 노루' '세상에 여자가 그 사람뿐이냐고 물으면' '꽃대' 3권 출간, 소설= '하늘바라기' '노크' 2권 출간, 우화= '2600년 후 이솝우화 그 다음 이야기' 4권 출간, 어른동화= '시간의 지평선 너머' 대서사 장편 탈고, 감성 스케치= '아주 사소한 것들' '그리움의 빈집' '예술의 하울링' 등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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