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이번 일요일 아침은 묵직하지 않아서 좋고 할 일이 없어서 좋아”

거울을 지그시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따뜻한 침대 속으로 다시 들어가 눕는다.

얼마만인가? 스스로를 얽매어 놓고 부풀어 버린 배를 감싸 안으며 시간을 붙잡지 못해 안달하던 날들, 이제 그 시간은 저만치 물러서 한가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다.

‘내가 쉬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 순간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새 이십여 년이 흘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올라서기를 하던 시간, 그리고 그 올라서기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맴돌던 날들, 그 순간들은 그저 허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없었으니까. 무언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고 그것들은 오로지 책임이란 굴레로 억지의 습성을 총총 감아쥐고 흔들었다. 남들이 다 가버린 사무실에서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주체 못해 삼십여 분씩은 누워있어야만 했다. 나중에 가서야 갑상선 항진증으로 그렇게 무기력하고 힘들었음을 알게 된 것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이상한 몰골의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다.

‘그랬었구나, 그래서 힘들었구나’ 자책하며 이대로 흘러가면 몸속의 세포들은 허무의 지면을 밟고 쓸어지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언가 다 못 채운 허전함에 해야 할 일들을 괜스레 붙잡고 헐거워진 나사를 돌리는 것처럼 일상의 일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짜증이 심해지고 불현듯 화를 내고 소리를 치고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어느 때는 말없이 온천 목욕탕에서 몇 시간을 행방불명으로 소식을 끊기도 했다.

그 중에 제일 힘든 사람은 그였으리라. 어느 날 거실에 앉아 멍하니 있는데 그가 들어와 말을 걸었다. “ 나, 당신 갱년기 때문에 힘들었어” 청천벽력 같은 그 말에 가뜩이나 무거워진 몸이 몇 십 배 똘똘 뭉쳐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부풀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주위사람들과 찍은 사진 속의 몰골이라니, 남들보다 두 배는 부풀은 낯설은 모습으로 내 눈을 혼란스럽게 했다. 자포자기도 수 백 번, 결국은 그 혹독했던 시간이 지나니 기어코 밝은 날이 오고야 말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삶이란 그런 것, 밝은 날 속에선 무섭기만 했던 갑상선 항진증 수술도 미루었다.

기분이 좋으니 십여 년이 지나도 수술은커녕 동위원소 예약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참아 내고 기쁨과 행복 속에 하고 싶은 일들을 거침없이 해 버렸다.

잠시 눈을 감고 주마등처럼 스쳐간 지난날을 생각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딸아이가 손주 녀석을 데리고 들어온다. 제 어미가 애인 줄 아는 딸은 군것질 거리를 한 박스 대량으로 싸들고 와서는 심심할 때 먹으라고 한다.

딸이 엄마처럼 군다. 설거지는 이렇게 하고 집 정리는 저렇게 하란다. 딸을 키워놓으니 시어머니가 따로 없다. 감사한 일이지만 서글프기도 하고 가르친 게 하나 없는데 어디서 배웠는지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안방에 들어갔다 나온 딸이 빨리 옷을 입으란다. 딸아이가 처음 집으로 돌아 올 땐 누워있거나 후줄근하게 하고 있으면 미안했는데 이제는 뻔뻔해져서 아무렇지도 않다. 그저 세월에 장사 없다며 받아들일 수밖에.

“어딜 가는데?” 물어 보려니 안방에서 공주를 데리고 나온다. 그가 나 대신 함께 살고 있는 개다. 그 개를 데리고 애견까페에 가자는 뜻이다.

30분 정도를 가니 작은 애견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많다. 우리처럼 큰 애견을 데리고 온 사람들은 없다. 공연히 시선을 끌 것 같아 쭈빗거려진다. 한참 후에야 큰 애견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생겨서 걱정은 덜 되었다. 혼자서 까페 2층에서 푹신한 의자에 앉아 애견들이 놀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니 그런대로 편안해진다. 저 쪽에서 그가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모습이 보인다. 애견 공주와 자기를 바라봐 주는 것이 뿌듯한 걸까. 모처럼 웃음을 보여주는 그에게 감사하단 표정을 짓는다. 딸이 오지 않았으면 그대로 하루를 쭉 뻗는 일이었지만 그런대로 애견센터에서의 하루도 괜찮다.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스스로를 어루만진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세상이 내가 느끼는 속도보다 빨리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근에서는 커다란 어마어마한 대형 슈퍼마켙이 들어와서 인산인해다. 그 중 솔깃한 것은 꼭대기 층에 애견 놀이터가 생겼다는 소식이다. 몇 시간이나 교통이 혼잡했다는 소식이 뉴스로 대서특필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묘한 것은 복잡한데도 한 번은 가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벌써 마음속으로는 다음 주 일정을 그리고 있다. 그 대형 슈퍼로 애견공주를 데리고 쇼핑을 하고 있는 모습을. 나도 이미 애견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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