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면 백포리, 여기까지 왔다 윤두서 고택 용마루에 기러기 한 마리 오래 앉아 있다 기러기는 움직이지 않는 기러기다 움직이지 않음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저 방식이 불편하다

망부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이곳 바다 내음이 인다 오갈피나무 검은 열매를 혓바닥에 물이 들도록 따 먹었다 모래가 살결보다 고운 송평에서, 꽃이 지나간 자리 같은 작은 새 발자국 따라 멀리 가본다 막다른 길에 바다가 서 있다

당두리 갈대숲이나 연구리의 살구나무 한 그루 노하리의 가지 부러진 노송이 새겨져 있는 내 몸은 티베트 사자의 서처럼 단번에 읽을 수는 없는 책과 같아서 다만 어란, 가학리, 금쇄동 하고 낮게 불러보는 지명들 다 끌어안고 다니며 길을 앓는다

나를 뚫고 지나가는 풍경들이 또 나를 앓고 있는 길 위, 몸에 미열이 인다 어불도 앞 책바위에 와 나는 내 안의 길을 다 쏟아놓는다 풍경들은 나를 잘 읽지 못한다.


조용미 시인

1962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한길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등이 있다. 제16회 김달진문학상, 제19회 김준성문학상, 제20회 고산문학대상, 제24회 동리목월문학상을 수상했다.


인송문학촌 토문재
인송문학촌 토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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