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장마로 인한 집중호우로 많은 재산과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온 국민이 수재민을 돕는 모습을 보며 우리 국민의 저력을 볼 수 있어 흐뭇했다.

장마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불행한 일이 해마다 반복되어 안타깝다.

챗GPT 초거대 AI 시대에 안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도록 예방대책이 마련되어야 하겠다.

예로부터 ‘오뉴월 장마’라는 말이 있다. 양력 6월과 7월에 한 달 정도 내리는 ‘지루한 비’를 장마라고 한다.

올해는 장마 초기에는 국지적 폭우와 불볕더위가 반복되는 ‘도깨비 장마’ 형태를 보이다가 특정 지역에 ‘극한 호우’가 지속하여 피해가 컸다.

사람들은 기상이변이라며, 지속 가능한 지구환경을 지키려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루한 장마 피해 소식을 듣자니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남한강 상류 산골 마을이었다. 그러다 보니 산불이 아니면, 물난리를 겪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중학교에 가려면 십 리를 걸어서 하진 강 나루터에 도착하면, 나룻배로 강을 건너고, 100m나 되는 큰 개울의 돌다리도 건너야 했다.

또, 날씨가 추워지면 개울물이 흐르다 튀어서 돌다리가 얼고, 그러면 미끄러워 건너기가 힘들었다. 우회하는 돌다리도 있었지만, 돌다리가 지름길이어서 되도록 돌다리를 건너다녔다.

어느 날 언 돌다리를 보고 ‘건널까? 말까?’ 망설였다. 친구들은 ‘넌 건널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며 부추겼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건너기로 했다.

‘조심조심’ 정신 집중해 건너려다 ‘아차!’ 하는 순간에 물에 빠졌다. 친구들은 좋아라고 웃어대며 물에 빠진 나를 남겨두고 멀리 있는 다리로 우회하려고 떠났다.

주섬주섬 바지와 운동화에 든 물을 빼고 뒷수습하고 있는데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가 와서 돌다리를 건너려고 시도했다.

‘어어, 운동화 신고도 빠졌는데, 하이힐로는 어림없지.’

나는 하이힐 신은 아가씨가 돌다리 건너는 모습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나의 예상을 뒤엎고 안전하게 돌다리를 건너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이미 수몰된 돌다리를 하이힐을 신고 건너던 그 아가씨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장마철이 되면, 우리는 늘 학교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장맛비로 물이 불어나면, 배를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학교 방송이 흘러나왔다.

“적성지역 학생들은 가방 싸서 바로 운동장에 모이세요! 급해요! 서둘러 운동장에 모이세요! ”

학교 방송 소리가 들리면 왠지 속상했다. ‘가난한 시골 학생들! 어서 나오세요!’라며 낙인찍는 듯했기 때문이다. 면 소재지이지만, 버스도 다니지 않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이었다.

방송이 나오면 잽싸게 가방을 싸서 운동장으로 뛰어나와 줄을 맞춰서 하진 나루터로 달려갔다. 그곳엔 언제나 고마운 뱃사공 아저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평소에 한 분이 배를 건너 주지만, 장마철에는 두 분이 힘을 합쳐야 강을 건널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보통 직선으로 강을 건너지만, 강물이 불어나면 상류로 배를 한참을 끌고 올라가 배를 띄운다. 배는 물살에 일렁이며 대각선 방향으로 떠내려가다 하류 쪽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배 안에서 쪼그리고 앉아 일렁이는 물결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강을 건너는 데 정말 무섭고 아찔했다.

여름방학 후 개학이 되면, 꼭 장마로 강물이 불어나 배로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숙제를 열심히 하고도 강을 건너지 못해 1주일 후에 학교에 가면 이미 숙제 검사가 끝나버렸다. 열심히 숙제한 나로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속상했다.

그때 이후 여름방학 숙제는 거의 하지 않았다. 늘 강물이 넘쳐 강을 건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겨울 방학 숙제는 어쩔 수 없이 했다. 강물이 꽁꽁 얼어도 강의 얼음판 위를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강 얼음 위에 굵은 동아줄을 강 건너까지 펼쳐놓고 그 줄을 따라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건너야 했다. 그래서 겨울 방학 숙제만은 꼭 해야 했다.

학창시절 우리는 늘 막 배를 탔다. 친구들과 놀면서 쉬엄쉬엄 학교에 가다 보면, 꼭 막 배를 타게 되었다. 강을 건너고 개울을 건너 학교 정문 쪽으로 가면 선도부 학생들이 늦게 왔다며 세워두었다. 운동장에서 나뭇잎을 줍다가 조금 후 교실로 들어가면 선도부 학생들이 같은 반 친구들을 훈육했다. 사실 훈육은 말뿐이고 벌을 준다고나 할까? 요즘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막 배를 타고 천천히 학교에 가면 선도부 학생들에게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바로 첫째 시간이 시작되어 막 배를 타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고나 할까?

1972년도에 150년 만의 대홍수로 기록된 큰 물난리가 났다. 그때, 동네 어른들과 경운기를 타고 하진 강가 나루터에 물난리 구경을 하러 갔다. 하진 강가로 가니 황토물이 무섭게 흘렀다. 초가지붕이 둥둥 떠내려가고, 그 위에 겁먹은 돼지가 꿀꿀거리며 물에 빠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온갖 쓰레기와 물건들이 둥둥 떠내려가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 당시 작은아버지가 단양 읍내에서 가겟방을 했다. 그때 물에 잠겨 퉁퉁 부푼 사탕을 작은아버지의 아픔을 아랑곳하지 못하고 철없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해가 자주 나자 국회의원 후보들이 ‘다리를 놓아 준다.’라는 공약을 내놓았다. 하지만, 공약은 헛된 약속으로 다릿발 2개 세운 뒤 끝이었다.

최근 다리가 놓였지만, 그 시절 고향 사람들은 거의 돌아가시거나 수몰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실향민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교대를 졸업하고 단양팔경 중 옥순봉과 구담봉이 있는 두항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단양이 수몰되고 신단양으로 옮겨간 때라 기존의 단양을 ‘구단양’, 새로 옮겨간 곳을 ‘신단양’이라 불렀다. 1990년도 단양 매포초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충주댐을 방류해야 할 상황에 서울지역의 피해를 줄이려고 충주댐 물을 방류하지 않아 물이 역류해 상류까지 넘쳤다. 그때 큰 피해를 본 곳이 도담삼봉 근처 도담초등학교였다. 수해복구 봉사활동을 위해 도담초등학교를 찾아갔더니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작은 책상 위에 무거운 오르간이 올려져 있는 기이한 장면이었다. 전국에서 수재민 돕기 위문품을 보내주었는데, 작업 중에 컵라면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지난 요즘도 장마철마다 피해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해마다 반복되는 다양한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는 대책이 챗GPT 초거대 인공지능 시대에 인공지능과 인간의 협업을 통해서 마련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소중한 재산과 생명을 지켰으면 한다. 세월은 약이기에 세월이 지나면, 아픈 기억도 잊히고 치유되기도 한다.

이번 집중호우로, 재난을 당한 수재민과 유가족들이 아픔을 잘 이겨내도록 온 국민이 지원해 일상의 삶의 터전에서 안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진지한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장마도 물러가고 불볕더위가 전 세계적으로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연대와 지구환경 보호를 위한 모두의 실천으로 후손들에게 깨끗한 초록색 지구, 살만한 자연환경을 물려 주어야 하겠다.

올여름은 어린 시절 장마로 인한 두려움과 아픔이 소환되는 여름이었다. 무섭게 흐르는 황토색 강물의 초가지붕 위에서 ‘꿀꿀’거리던 돼지들의 비명과 그 시절 우리가 걷던 길 위의 발자국과 친구들의 재잘거림 소리가 남한강물 깊은 곳에 묻혀서 우리를 부르는 듯하다.

“아저씨이~ 배 건너와요~”라고 소리치면, “알았다~”라고 대답하던 뱃사공 아저씨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남한강에 얽힌 추억만은 우리 가슴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지금도 여전히 남한강은 흐르고 있다.

 

강심원 아동문학가
강심원 아동문학가

약력

충북 단양 출생

≪문학미디어≫ 아동문학(동화) · 시 부문 신인상, 문학미디어 작가상 수상

문학미디어작가회장 역임, 현) 수원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

시집 『패랭이꽃』, 공저 『문살에 핀 꽃』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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