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동 시인 · 전 경기적십자사 회장
김훈동 시인 · 전 경기적십자사 회장

제일 일찍 잠 깨는 것이 무궁화요/꼭두새벽 어둠이 가시기 전에 /필 채비를 차려요/그 희뿌연 어둠 속 등불 같은 무궁화를 벌 나비가 모를 리가 있겠어요? 박경용 시인은 이렇게 무궁화를 묘사했다. 무궁(無窮)은 끊임없다는 뜻이다. 온 생명을 다 바쳐 피는 무궁화 모습을 새벽같이 보고 있다. 무궁화는 다른 꽃들보다 일찍 피고 일찍 진다. 다음 날에 더 일찍 피우기 위해서라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무궁화를 우리 나라꽃으로 삼은 이유는 각별하다. 꽃 하나하나는 하루 만에 진다. 하지만 나무 전체로 볼 때는 끊임없이 새로 피고 또 새로 이어서 핀다. 무궁한 나무요 무궁한 꽃이다. 무궁화는 좋은 결과를 위해 오늘 진인사(盡人事)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던 우리 민족 정서와 잘 맞는 꽃이다.

무궁화의 화심(花心)처럼 태양의 영광이 나라의 앞날에 영원토록 비치기를 기원하는 심성이 깃들여 있다. 무궁화는 아름답다. 피는 시간이 짧다. 제때가 아니면 그 아름다움을 취할 수가 없다. 예로부터 조선을 근역(槿域)이라고 했다. 무궁화가 많은 땅이라는 뜻이다.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國花)로 굳어진 것은 1907년 윤치호가 애국가 후렴에 썼다. 1925년 10월25일 동아일보에 ‘조선 국화 무궁화의 내력’이라는 글이 실렸다. 안창호가 우리나라의 고유한 역사⦁문화⦁국민성을 알리는 국수(國粹)운동을 펼칠 때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주창했다. 남궁 억의 무궁화 보급 운동 등으로 무궁화가 전 국민에게 나라꽃으로 널리 알려졌다.

‘빛의 나라 아침 햇살 꽃으로 핀다/머나먼 겨레 얼이 굽이쳐온 정기/은은하고 우아한/하늘 땅이 이 강산에 꽃으로 핀다./초록 바다 아침 파도 물보라에 젖는다/동해, 서해, 남해 설렘/오대양에 뻗치는/ 우리 넋의 파도/겨레 끓는 뜨거움/바다여, 그 겨레 마음 꽃으로 핀다//무궁화, 무궁화/낮의 해와 밤의 달/빛의 나라, 꿈의 나라, 별의 나라 영원한 겨레/ 우리 꿈의 성좌 끝없는 황홀/타는 안에 불멸의 넋 꽃으로 핀다//별을 걸어 맹세하는 우리의 사랑/목숨보다 더 값진 우리의 자유/민주, 자주, 균등, 평화의 겨레 인류의 꿈/꽃이여, 불멸의 넋 죽지 않는다/오고 오는 세계 영원 피고 또 핀다.’ 박두진 시인은 나라꽃 무궁화가 우리 민족의 주체적 사상과 정서, 철학, 서정이 유기적 일체를 이루고 있음을 형상화했다.

백정기는 일본으로 압송되어 복역하던 중 “해방된 조국땅 어디에도 좋으니 무궁화 한 송이를 놓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옥사했다. 윤봉길 의사는 “무궁화 삼천리 내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 광분하는가”라며 “피 끓는 청년 제군들은 아는가 모르는가”라는 유언을 남겼다. 만해 한용운은 옥중 시<무궁화를 심으과저>를 출옥 후 잡지 『개벽』에 게재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넷나라에 비춘 달아/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마음 비춘 달아/계수나무 버혀내고 무궁화를 심으과저” 라며 무궁화를 통해 독립의 염원을 표현했다. 일제 강점을 상징하는 억압의 계수나무를 베어내고 우리가 간절히 염원했던 독립과 광복을 달에조차 심고 싶은 무궁화로 표현했다. 언론인이자 문일평은 조선일보에서 “무궁화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것은 영고무상(榮枯無常)한 인생원리를 보여줬다. 또한 여름에 피기 시작해 가을까지 계속적으로 피는 것은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군자의 이상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며 조선이 무궁화를 국화(國花)로 삼은 것은 이런 관계가 있다고 했다. 강원도 홍천에서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남궁 억은 “무궁화를 지키고 사랑하는 것이 나라사랑이라”고 여겼다. 그가 세운 초등학교 뒤뜰에 7만 그루의 무궁화 묘목을 길러서 몰래 나누어 주었다. “일본 국화 사쿠라는 활짝 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는 면면히 피어나는 것처럼 조선의 역사가 영원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일로 학교는 폐쇄되고 무궁화동산은 불살라졌다. 남궁 억은 옥고를 치르면서도 “무궁화는 조선을 표징하는 국화이므로 자국의 국화를 장려하여 민족사상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그 후 노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교육자 우호익은 “국화는 그 나라 사람에게 한없는 총애를 받고 있다. 조선사람은 삼척동자라도 나라꽃은 무궁화”라고 할 것이다. 우호익의 <무궁화고(無窮花考)>는 숭실전문학교 교수 시절 쓴 무궁한 관련 최초의 논문이다. 무궁화의 사적(史的) 가치와 국화가 된 유래를 논증했다. 이렇듯 독립운동가들은 나라꽃 무궁화를 통해 나라의 영원히 뻗어남과 자손의 창성(昌盛)함을 알렸다. 수원 청소년청년재단, 만석공원, 아파트 단지 등에 다양한 종류의 무궁화 공원이 만들어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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