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오랜만에 모임 연락이 왔다. 내가 모임이름을 짓고 활동도 활발하게 한 모임이라 애착이 많이 가는 모임이었다. 모임 구성원은 직장에서 발탁되어 연수를 받고 각 지역에 가서 연수내용을 강의로 전달하는 강사활동을 하게 된 구성원들로 모인 결사체. 연령차가 많이 난 모임이지만 모임의 성격상 위계가 잘 이루어져 처음 모임 결성이 되었을 때는 활기찬 담소들이 오고 갔다. 해가 갈수록 한두 사람이 승진을 했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축하를 거하게 해 주며 기쁨을 함께 했다. 세월이 가면서 주위로부터 그 모임 잘 이루어지고 있느냐고 물어 올 때는 우쭐한 면도 있었다. 십여 년이 지나니 스무 명이나 되는 회원 모두가 기관의 장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띠 동갑이 되는 후배가 승진했을 때는 그야말로 환희의 도가니가 되어 서로 부둥켜안을 정도로 기뻐하며 성공을 함께 나누었다.

모임은 점점 더 깊어지고 끈끈해져서 일박 이일 나들이도 가게 되었고, 맛있는 특산물을 찾아 여기저기 관광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선배들이 한 분 한 분 씩 정년을 맞이하고 직장을 떠나갔다. 서로들 직장 일에 충실한 모범생들이라 직장을 그만 두는 일에도 격려와 아쉬움을 맘껏 몰아주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얼마의 세월이 흘러 코로나라는 엄청난 병마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우리는 저절로 소원해졌다. 규범이라면 제일 먼저 지킬 줄 아는 모임이라 나라에서 정한 모든 일에 동참하며 제일 먼저 끈끈하고 자부심 많았던 모임을 연기하고 또 연기했다. 그러기를 이년 가량 지나면서도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어 모임을 뒤로 미루며 더욱 조심하여 세월을 흘러 보냈다.

간간이 주위에서 들리는 소문과 신문에 난 근황들로 각자의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만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기만 헀다.

어느새 회원들은 대부분 정년을 말하는 나이가 되었고 직장에서의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시간을 내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만날 날이 가까워졌는데 독감이 심해 두드러기까지 나더니 기어코 목까지 잠겨 버려 누가 보아도 걱정이 될 만큼 심해진 상태가 되었다. 참석을 할까 말까 내심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기간이 조금 남아 있어 답변을 미루고 있는데 조금씩 참석인원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반갑고 보고 싶은 마음이 참을 수가 없었다. 기어코 자신도 모르게 “참석합니다.”라고 답을 하고 말았다.

그 시간까지 분명한 것은 독감이 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당일 날이 되어서도 쉰 목은 전혀 차도가 없었다. 하지만 약속이니만큼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장소로 갔다.

정해진 장소에는 반갑게도 멀리서 가까이에서 모두들 참석해 기립박수를 쳐 주었다. 서로서로 뜨거운 악수를 하고 정해진 자리에 앉으니 이야기꽃이 만발했다. 사 년 만의 해후이니 얼마나 반가우랴.

옆에 있는 회원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차까지 두고 왔다고 했다. 그냥 좋아서 허허실실이다.

지난 만남을 상기하듯 한 회원이 물어본다

“우리 언제부터 만났죠?”

“2004년부터 만났으니 20년이나 되었네요.”

퇴직한 분도 계시고 앞으로 퇴직할 후배들이 섞여 있는데 저마다 회상에 빠져 지난날을 음미하는 듯했다.

각자들 머릿속에는 만난 햇수도 잃어버릴 만큼 꽤 오래된 사이가 되었으니 만감이 교차할 수 밖에. 식사를 하면서 앞자리 옆자리를 둘러보며 근황을 물어보고 안부 인사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대표가

“너무 오랜만에 뵈니까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한 분 한 분씩 근황을 들어 보기로 해요.”

누구라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다들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윤선배가 일어나 근황을 이야기 했다. 그 분만이 한 눈에 알아 볼 정도로 꽤 수척해지고 말라있었다. 눈빛은 맑아 보였으나 힘이 없어 보였다.

“예전 그대로시네요. 맑은 표정이 너무 좋아요.”라고 했더니 웃으며 그분이 말한다.

“맑다니 영혼이 없다는 소리처럼 들려요.”

“철학적으로 말한 거예요.”

밑도 끝도 없는 내 이야기가 허공을 치며 사라지기도 전에 회원들은 서로 서로 말하기에 바빠 답변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눈만 마주치고 말을 끊었다. ‘느낌은 아시겠지’ 여기며 주위를 둘러보니 서로 반가운 마음에 여기저기 활기 넘치는 이야기로 한창이다. 같이 맞장구치다가는 정신없겠다 싶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듣기만 했다. 윤선배는 헬스장에서 운동기계에 다쳐서 수술까지 한 모양이다. 재활중이라고 하는데 깡마른 모습이 위도 좋지 않아 보인다.

현직에 있을 때 많이 존경했던 분인데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아무쪼록 오래 오래 건강하시라고 마음속으로 빌어보며 오고가는 대화를 즐긴다. 마칠 때 쯤 누군가 말해 준다. “사모님이 편찮으셔서 병구완을 계속 하셨대요.” ‘그러셨구나. 그 와중에 ’저 정도이면 잘 견디고 계시는 거야. 돌아가신 분들도 계신데‘ 하며 속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 옛날 승진점수를 따기 위해 애쓸 때 윤선배는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흥분된 표정으로 미리 알려주시며 기뻐해 주셨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사람은 살아가며 일상에서 스스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 있다. 누군가가 정말로 간절하게 바라는 것을 필요로 할 때 관심과 응원은 최고의 선물이 된다는 것을. 한사람씩 돌아가다 말할 차례가 주어졌다. 무슨 말을 할까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생각이 헷갈린다.

평소의 관점대로 「오십대 오십」이란 주제가 떠올랐다. 우리의 삶속에서 행과 불행은 절반의 오십과 절반의 오십이라는 것을. 행복한 순간 뒤에는 절반의 불행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 반대로 불행의 순간에도 절반의 행복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은연 중에 터득하게 되었다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다고 박수를 쳤다. 그 진리는 아마도 겸손하게 세상을 살라는 인생이 주는 교훈이라고 끝맺음을 했더니 다들 박수를 쳐 주었다. 4년 동안에 연로하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 때 이 모임이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응원해 주고 믿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해 보니 이 모임에 대한 고마움이 배가 된다.

모임이 이십년이 되었으니 앞으로도 얼마간은 더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모임을 해체하자는 의견을 뒤엎고 후임회장을 뽑아 남은 회비를 물려주며 찻집에서 마무리를 했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 빈털터리일지라도 갈피에 젖은 삶의 순간은 끈끈한 정으로 살아간다. 소중한 것은 서로 의지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해후였다.

저작권자 © 서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