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늦겨울 봄을 재촉하는 빗소리가 지난밤을 예고편으로 축축한 한나절을 보내게 하고 있다.

가끔 약간의 눈발도 함께 섞여져 찔끔찔끔 보챈다. 무엇을, 어쩌라고, 물음표를 점잖게 마음 한편으로 밀어 두고 어제의 약속에 끌려서 밖으로 향한다.

그녀는 H증권의 사원인데 이재에 밝지 못한 주위사람들에게 세금계산이나 연말정산에 보탬이 되는 정보를 전해 준다. 늘씬한 키에 미모 또한 빠지지 않는 그녀는 외형에서 오는 매력보다 내면의 심성이 가히 일품이다. 잃어버릴 만하면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고 보험수가나 계약관계까지 확인도 해 준다.

옛날 그녀는 잘나가는 금융계 세일즈 우먼이었다. 그녀의 말로는 겉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일에 신물이 나서 모든 걸 접고 증권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지만 잘 살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주변에 금융계 관련 사람들을 잘 알고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갈 수 있는 일이다. 오늘도 점심을 먹자며 그녀가 불렀다. 이번에도 분명 무언가를 제의하고 약간의 혜택을 주려는 모양이다. 사회에 나와 보니 불분명한 친절 뒤에는 꼭 손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아 아무리 잘 해줘도 돌다리도 두드리며 걷는다는 속담처럼 뒤로 돌아서서 다시 한 번 점검을 하곤 한다. 그녀만큼은 그런 일에서 정확하다. 근 십여 년을 알게 된 사이라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점검 실수로 다음에 만나면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녀가 아니다. 고맙게도 그녀는 계약 건을 줄여 주며 다른 한 건에 대해 일 년 정도 커미션을 주겠다고 한다.

사실 그렇게 된 연유는 그녀가 남편 사업으로 인해 곤란할 적 꽤 많은 돈을 그녀가 하는 일에 지원을 해준 일이 있었다. 몇 년 후 무사히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기뻐하며 끈끈하게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그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근황이야기를 하다가 일을 마치고 까페에 들렸다. 마침 가지고 있던 쿠폰으로 요거트와 빵, 커피를 시켜 맘 편안히 담소를 한다. 2층 창가를 찾다 보니 밝은 쪽은 젊은 남자들 일행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옆으로 몇 명의 중년여성들이 앉아 있다. 하는 수 없이 한적한 다른 곳을 찾으니 창밖이 잘 안 보이는 곳이다. 마주 앉아 그녀의 모습을 오랜만에 살피니 직장에서 많이 성장한 모습이 그녀의 안정된 모습과 클로즈업 되어 보기가 좋았다. 이대로만 가면 그녀에게도 더 밝은 봄날이 오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음악소리와 함께 협회 전화가 온다.

순간 그날의 하루는 변질되고 추절추절 빗소리로 인한 창밖의 가라앉은 무채색의 도시는 거리 한 복판을 지나는 차 소리만 신경을 거스르며 요란하게 확장된다.

잘 나가는 일에 돌 던지기 하듯 내 일도 아닌 전화로 대화한 사람의 일인데도 왜 기분이 다운되는 걸까. 내심 그가 잘 되기를 기대하고 있던 탓일까, 제출했던 서류가 낙방되었다는 소식이 충격으로 다가오다니.

도저히 감정조절이 잘 안 된다. 안절부절 하는 표정을 보고 그녀가 묻는다. 누구라도 불러서 이야기 해 볼까요? 주위에 누구든지 되지 않는 일을 알게 되면 저절로 다운되는 것은 무슨 법칙일까. 이리저리 전화하다가 잘 이해해 주는 또 다른 지인을 불렀다.

‘날씨 탓인지 몸이 너무 아파 집에 있어요’

얼마 전부터 지병이 도져있어 부쩍 병원을 찾는 그녀가 왔다. 횡설수설 속상한 이야기를 하니 그런대로 잘 받아 준다. 술이나 듬뿍 먹고 싶은 마음이지만 술도 잘 못 먹는 처지라서 까페에 앉아 그야말로 잡담을 안주삼아 상상 속 원망의 술을 들이킨다.

그 후의 마무리는 다운된 감정이 시발점이 되어 새벽 한시를 훨씬 넘겨 마음이 풀릴 때까지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건유발 전화의 당사자와 함께 했다.

일종의 부정적 일들에 대한 경험으로 인해 남의 부정적인 일들을 내 것인 양 동화시켜 화를 내는 것은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치 제 일인 양 오지랖 넓게 과잉반응을 보이는 내 안의 나를 고밀도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겠다.

오르락내리락 했던 하루의 마무리가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의 지인으로 인해 위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뿌듯한 일이지만. 남겨진 의문은 그 지인도 나처럼 풀렸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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