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그만두라고?
1984년 12대 총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씨가 갑자기 귀국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DJ는 하원 민주당 소속의 페이건 의원, 포글리에타 의원 등과 함께 입국했다.
그러지 않아도 필리핀에서는 미국 망명 중이던 베니그노 니노이아키노 상원의원이 귀국했을 때(1983.8.21) 마르코스 대통령의 보안군이 기내로 들어가 아키노를 즉석에서 권총으로 저격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 만큼 DJ로서는 당연히 안전장치가 필요했을 터였다.
그때 나는 마포구 서교초등학교에서 선거 유세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후 1시가 조금 지나 수만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나는 막바지 유세를 할 참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그러나 연단에 올라가기도 전에 군중들은 야유와 폭언, 각종 소음과 소란으로 나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귀국하는 DJ를 마중 나갔던 수천 명의 환영 인파가 기동경찰의 제지로 오갈 데가 없자 "야, 우리 동교동으로 가자!"하며 몰려왔고, 거기도 철통같은 경찰 저지망이 있자 군중이 가까운 유세장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었다.
"김대중! 김대중"을 연호하는 군중들에게 집권 여당 후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친애하는 유권자 여러분"하고 말문을 열었으나 "유권자고 나발이고"하는 막말이 돌아왔다. 이에 질세라 우리 측 선거운동원들도 맞고함을 질렀다. 유세장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나는 그 순간 연단에서 마이크를 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김대중 씨가, 오늘 김대중 선생이, 아까 보니까 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 씨가"이런 식으로 계속 김대중, 김대중 하니까 군중은 갑자기 엇, 이게 무슨 소리지? 하고 궁금하여 조용해졌다. 그 틈에 나는 말을 이어갔다. "김대중 씨가 동교동에 살기 때문에"그리고 농담 섞인 어투로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나도 김대중 씨를 잘 알아요. 가까운 시일 내에 김대중 선생 한번 찾아뵐 생각이에요."
그러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겨우 몇 마디 유세 같지도 않은 유세를 대충 끝내고 내려왔다. 뒤에서 줄곧 나를 지켜보던 마포경찰서 정보과장이 내 소매를 붙들고 말했다. "선배님 나가실 때 저쪽 뒷문으로 빠져나가시죠. 그쪽에 사람들 배치해 놓았습니다."
나의 경복고 후배인 정보과장은 내 선거 참모보다도 더 열심히 모든 걸 챙겨줬다. 그는 유세장 앞쪽으로 나가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죽으면 죽었지 이 봉두완이가 뒷문으로 빠져나가면 되겠어?"
국민을 대표하고 대변하겠다는 놈이 국민이 무서워 뒷문으로 도망가다시피 한다면 앞으로 국민을 위해 내가 어떻게, 무슨 정치를 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평생 소신 있는 언론인으로 국민 앞에 서 왔던 이 봉두완에게 오직 돌파만이 살길이었다.
유세가 다 끝나고 군중이 흩어질 때쯤 나는 연단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연세대 후배들과 주먹을 쥐고 소리 지르며 군중을 뚫고 앞으로 나갔다. 나는 무등을 타고 나가면서 큰 소리로 연세대 응원 구호인 '아카라카'를 외쳤다. 그러자 수십 명의 젊은 후배들이 약속이나 한 듯 흰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나를 따라 외쳤다. "아카라카, 아카라카 칭, 아카라카 쵸, 아카라카 칭칭 쵸쵸쵸."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이를 지켜보던 많은 군중은 우리에게 슬슬 길을 비켜주면서 '와'하고 소리도 지르고 박수도 치면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선거운동원들이 '와'하고 따라오면서 "아카라카 봉, 아카라카 봉, 봉두완, 봉두완, 봉두완 만세"하며 운동장을 빠져나오는 길에 나는 주변에 있던 몇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젊은이 하나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봉두완 씨, 나 봉두완이 좋아하는데 왜 군인들 따라다녀요. 왜"하며 울부짖듯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흥분한 나머니 그를 향해 말했다. "나도 생각이 있어서 그래. 나라를 위해서 일하려고 그래. 야당 하면 그냥 쉽게 할 수 있지만 일을 하려니까 여당을 하는 거야."
나는 그때 집권당에 들어가야 낙후된 용산.마포 지역을 개발하고,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젊은이의 절규가 계속 나의 귓전을 때렸다. 가슴이 쓰렸다.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샤워를 하는 도ㅇ안 나도 모르게 와락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왜 군인들한테 붙어서 놀고 있지?' 그때부터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얼마 전에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성창기 보좌관이 문을 잠그고 들어오더니 어렵사리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대구 출신인 성창기 보좌관은 본래 입이 무거운 편이지만 일에 성실하고 상황 판단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11대와는 달리 12대 국회는 상당한 정치적 파란이 예상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뒤따를 것 같다는 얘기였다. 문민 시대를 갈망하는 국민의 염원이 지금 표밭에서 싹트기 시작했다는 논리였다. 이에 따라 내가 또 다시 지역구에 출마하여 정치를 계속하는 데 대한 부담이 너무 클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며칠 심사숙고했는데, 혹시 이번 선거에 나가지 않을 순 없을까요?"
"뭐라고? 이번 기회에 정치를 그만두라고?"
"정치는 이쯤에서 그만두시고 신문이나 방송 쪽 일을 다시 하시는 게 어떨지 해서요."
성 보좌관은 이 말 한마디를 하려고 며칠 동안 혼자서 고민한 것 같았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겠다고 작심한 듯 그의 표정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나는 한마디로 이 녀석이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나 싶었다.
"이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국회의원 출마를 하지 말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고 신뢰하는 보좌관이 어렵사리 한마디 한 걸 참지 못하고 벌컥 화부터 냈다. 언제나 옳은 소리만 하는 그에게 당장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탓이다.
"알았어, 그건 좀 생각해 볼 일이고, 사무국장한테 각 동네 지도장들 좀 오라고 해서 의정 보고서나 빨리 돌리도록 해 !"

DJ와의 대담
1980년 봄, 성창기는 TBC는 보도국 오홍근 기자와 함께 광주사태를 현장 취재한 민완 기자였다. 그해 11월 30일 TBC가 KBS에 통폐합되자 그는 KBS에 가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나는 그때 미국 마이애미 인근 바하마 나소에서 열린 국제방송보도국장 회의에 참석하고 12월5일 워싱턴에 기착했다.
나는 호아급히 귀국하여 12월15일 마포구 신촌 로터리에 있는 예식장을 빌려 지구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그때 성창기만 KBS로 가지 않은 게 아니라 TV 편성국의 이정옹 PD, 관리국의 안승완, 수송부의 이의행, 논평위원실 비서 이효경 등이 모두 아무 조건 없이 날 따라왔다. 그들은 똘똘 뭉쳐서 나를 도왔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위해 온갖 고생과 희생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한 번도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었다. 정말 살신성인 그 자체였다. 그중에 내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던 성 보좌관이 12대 국회 앞에 전개될 정치 상황을 이미 꿰뚫고 있었기에 나에게 어렵사리 한마디 한 것이다.
나는 그가 갑자기 허리도 못 쓰고 잘 걷지도 못하게 된 것을 보고 어디엔가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상 그가 없어서는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잘나갈 때 보상할 필요가 있었다.
"이봐, 자네 선거 준비 중단하고 가족하고 한 1년쯤 미국에 갔다 와. 공부도 좀 하고, 내가 생활비, 학비 마련해줄 테니."
성창기는 대학 동창들이 있는 캔자스로 갔다. 연대 정외과를 나온 그는 캔자스 대학 대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동문들과 학생들 틈에 끼어 한국의 정치 상황을 놓고 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미국 ABC 방송 통신원으로 일하고 있는 마이클이라는 미국 청년이 찾아와 내게 통사정을 했다. 그는 1969년 내가 <중앙일보>로 옮길 때 TBC라디오 영어 뉴스를 진행하고 있어서 나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마이클은 날 붙잡고 "데이비드, 나 한 번만 봐줘. 살려줘"하고 애원하며 매달렸다. 생방송에 출연해 달라는 것이다.
미국 본토에서 매일 밤 11시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되는 ABC-TV의 <나이트 라인>은 과거의 CBS <이브닝 뉴스>의 월터 크롱카이트 못지 않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유명한 TV 앵커 테드 카풀이 진행하는 토론 프로그램은 항상 생방송을 원칙으로 삼았다. 또 서로 상반되는 두 사람과 중입적 입장의 한 사람을 불러 앉혀놓고 열띤 토론을 하는 방식이다.
내일 오후 1시(워싱턴 시간 밤 11시)에 망명 중인 김대중 씨와 대담하는 프로그램인데 나에게 정부 여당을 대표하여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안팎에 널려 있는데 왜 나보고 그런걸 하라는 거야?"
난 쏘아붙이듯 한마디 했다. 마이클은 거의 사색이 되어 말했다.
"이 사람 저 사람 알아봤는데 다들 안 하겠대. 김대중 씨와는 모두 상대를 안 하겠대."
하기야 어느 누가 천하의 김대중과 맞상대를 할 것인가! 본전도 못 찾을 짓을 뭐 하러 한단 말인가? 더욱이 영어로 토론을 벌이는 걸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것도 백전백패 할 것이 뻔한데 미쳤다고 덤벼들어 손해를 본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빙빙 돌다가 나한테까지 온 것이다. 내가 오후 1시부터 선거 유세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이클은 1시30분까지 30분만 앉아 있으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마이클에게 알았다고만 말하고, 지금 보다시피 정신없이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다. 나는 당 대변인과 국회 외무위원회 소속인 유학성, 이종찬, 현홍주 의원 등과 협의를 했다. 현홍주 의원이 말했다.
"위원장님, 오늘 같은 상황에서 누가 나서서 김대중 씨하고 싸웁니까? 제 생각에는 죄송하지만 위원장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인 게 뻔한데 위원장님 말고 우리 당에 나가 싸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현홍주 의원은 똑독한 검사 출신으로 안기부 차장도 지냈고 상황 판단도 정확할 뿐 아니라 미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유능한 인재로 내 친한 친구의 동서이기 도 했다. 그래서 12대 국회 때 내가 외무위원회로 모셔 오다시피 했다.
나는 ABC 방송 지국에 전화를 걸어 나가겠다고 통고했다. 나는 철의 삼각지대에 투입되는 일선 소대장과 같은 필사즉생의 신념으로, 집중포화가 쏟아지는 격전지에 카빈 소총 하나를 둘러메고 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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