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의도 KBS 스튜디오에 마련된 ABC-TV 카메라는 조그만 렌즈만 눈앞에 보일 뿐 방 안은 온통 캄캄했다. 나는 워싱턴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김대중 씨를 볼 수 없어도, 그곳에서는 사방에 TV 모니터가 있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있었다. 해설과 토론을 위해 미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지낸 리처드 홀부르크가 나와 있었다.
민완 기자 출신인 테드 카풀은 처음부터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 정권이 군사독재 정권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권을 탄압하는 사례가 많은데 사실이냐?" 등등 예상했던 질문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봐요, 테드! 전두환 정권이 독재인지 아닌지 말하기 전에 난 지금 국회의원 재선에 나서서 유세하느라고 정신없이 바빠 죽을 지경이다"고 유머스럽게 엄살을 떨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KBS 스튜디오가 가장 악랄한 북한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으로부터 고작 28마일밖에 안 되는데 민주주의 한답시고 그런 위협 속에 민주적 절차에 의한 두 번째 총선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우리 나름대로 민주주의 과정을 밟아가며 정치라는 걸 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미국처럼 우리 나라 캐나다나 멕시코로부터 침략당할 위험이 없는 경우와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테드 카풀은 중도에 내 말을 중단시키며 "알았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김대중 씨에게 거의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김대중 씨는 남북 대치 상황은 인정하지만 남한에서의 정치는 민주 인사들을 젖혀두고 군부가 통치하고 있다는 식으로 줄곧 부정적인 점만을 강조했다.
그 다음 인권유린에 관한 질문에 대해 김대중씨는 국제사면위원회 자료를 인용하면서 지금 한국에는 정치범이 2800명이나 구속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뚜렷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그 숫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게 모두 정치범인지 아닌지는 현재 알 길이 없다는 식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시는 이게 반해 또박또박 자료를 중심으로 논리정연하게 자기주장을 펴나갔다. DJ가 언제 그렇게 영어 공부를 했는지 나는 깜짝 놀랐다. 다만 영어 발음이 미국 시청자들이 듣기에 좀 정확치 않다 싶은 대목은 곧바로 영어 자막으로 처리했던 모양이다.
나는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귀에 이어폰으로만 듣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 얘기를 정확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테드 카풀은 인권유린 사례와 군사독재 부분에 명확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나를 코너로 몰았다.
나는 즉각 이의를 제기하면서 항의조로 말했다.
"이봐 테드, 내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5공화국이 군사독재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우리 나름대로 민주정치 형태는 갖추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국회도 선거를 통해 구성했고. 우리는 아직도 남북이 대치 중에 있어. 미국하고는 달라. 나도 너처럼 앵커맨 출신이야. 그 당시 방송할 때 정부 정책을 정면 비판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나는 그래도 몇 마디 지껄이고 살았어."
테드 카풀은 "몇 마디?"하며 히히 웃었다.
그러자 한국을 잘 아는 리처드 홀부르크 차관보가 끼어들어 나를 거들었다.
"그래요. 방금 데이비드가 말한 대로 한국은 지금 나름대로 선거절차를 밟아가며 민주정치를 하고 있어요. 이에 비해 휴전선 북쪽 공산 체제는 가히 조지 오웰의 '1984'를 방불케 하죠. 북쪽은 빅브라더 나라에요. 두 체제는 확실히 다릅니다. 나는 남한이 민주국가라고 보고 싶습니다."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 차기 국무장관감이라고 말하는 그의 설명에 모두 침묵하며 수긍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전인수 격으로 그가 마치 내 편에서 부연 설명을 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마디씩 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김대중 씨와 나는 서로 반대쪽에 서 있지만 야당 인사로, 민주화 투쟁에 평생 몸 바쳐온 민주투사로, 나도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나 김대중 씨는 다시 한 번 국제사면위원회 인권탄압 사례 자료를 인용해가며 한국은 아직도 완전한 민주정치를 하기엔 갈 길이 멀다고 주장했다.
이날의 토론은 김대중 씨에게 오랜만에 소신을 밝힐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과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찬반 토론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얼핏 보기엔 나의 참패요, 김대중 씨의 승리로 끝난 셈이지만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그런대로 김대중-봉두완 TV 토론 자체만큼은 정치적 함축성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 캔자스에서 친구들과 함께 이를 지켜보던 성창기 보좌관은 나에게 국제전화로 토론 내용을 나름대로 분석, 평가해주었다. "참 어려운 일 하셨습니다. 아주 잘됐다고 보기엔 좀 그렇습니다만, 일단 김대중 씨 상대로 TV 토론에 나가셨다는 점만은 높이 살 것입니다"하며 위로 겸 격려의 말을 전했다.
그 이튿날 마포 공덕동 언덕길을 누비고 다니는데 비서가 헐레 벌떡 달려와 당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나는 공중전화로 김용태 대변인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나와 함께 자유당 말기부터 정치부 기자를 했고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끝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내 후임 대변인을 하고 있었다.
"전화 했어?"
"그래, 너 빨리 와봐. 권익현이 보자고 한다. 김대중하고 대담한 것 때문에 할 말이 있는 모양이더라."
나는 관훈동 당사 3층에 있는 사무총장 방으로 갔다. 전 대통령과 육사 동기인 권익현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봐 데이비드, 어제 수고하긴 했는데 무슨 방송을 그리 하노? 우리가 무슨 2800명이나 되는 정치범을 집어넣고 있어? 대학생들이 다 집시법 위반으로 들어가 있는 놈들 아이가!"
"그럼 정치범이 하나도 없단 말이요?"
"그게 무신 정치범이고? 데모하다 잡혀간 놈들 다 정치범이가?"
"에이, 그만합시다! 나 좀 바쁜 몸이니까."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고받는 것보다 표밭에 가서 유권자들 만나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그 방을 나왔다. 권익현은 내가 위원장으로 있는 외무위원회 소속으로 사람이 호탕하고 폭이 넓은 사람이었다. 얼마 전 미국을 같이 다녀왔기 때문에 우리 둘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어디서 누군가 ABC <나이트 라인> TV 토론을 보고 한국 정부의 인권유린과 정치범 상황을 지적한 DJ의 발언에 내가 조목조목 따지며 덤벼들지 못했다는 분석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권익현은 내가 DJ와 무슨 대담을 한지도 모르면서 그 보고에만 기대어 내게 경고 발언을 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나와 함께 대미관계 대책을 세우고 있는 청와대 정무비서관 최창윤 박사가 대통령께 보고한 TV 토론 평가보고서 사본을 보여 주면서 내게 말했다.
"위원장님, 수고하셨어요. 대통령께서 잘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래요? 대담하는 걸 보셨나? 뒤에서 말들이 많은 모양인데."
"아이고, 위원장님. TV에 나가서 김대중 씨하고 한 것만도, 하여간 수고하셨어요. 역시 한국의 월터 크롱카이트라더니."
그는 없는 얘기도 만들어 기분 좋게 해주는 성격이었다. 육사 출신 치고는 비교적 싹싹하고 융통성 있는 사람이었다. 그 후 미국 TV에 나가서 토론한 사람은 결국 주미 대사를 지냈던 김경원 교수와 현홍주 변호사 두 사람 정도였다.
밑지는 장사를 누가 할소냐? 언제나 정치판에선 일선 소대장처럼 앞장서서 돌격하는 놈만 손해 보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런 용맹스런 투사가 있기에 후방이 편한 법이다. 집권 여당은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눈치만 보고 있다가 나중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남의 험담이나 하기 일쑤였다.
나는 구 후에도 선거 유세를 계속하면서 멀어진 민심을 조금이라도 사로잡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DJ의 귀국으로 정치판의 흐름이 '급전직하'로 뒤바뀌는 상황에서 그래도 힘든 고비를 잘 넘겼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택시를 타면 "봉두완 씨 아니세요?"하고 얼굴을 알아보거나 "어쩜 봉두완 씨하고 목소리가 똑같네"하는 말을 듣느다. "혹시나?"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쳐다보면 나는 장난 삼아 "그 사람은 내 동생입니다. 우리 형제들 목소리가 다 똑같아요"라고 말하곤 한다.
"아, 그때 봉두완 씨가 야당으로 나왔으면 했었는데 실망했어요."
"실망할 것 없어요. 그땐 여당이나 야당이나 매한가지였으니까요."
"하기야 뭐, 그때 봉두완 씨가 우리 사는 동네 많이 개발하긴 했어요. 수돗물도 놔주고."
"그거 뭐 내가 놔줬나? 5공 정권에서 한 것."
"맞아요. 난 그 때도 택시 운전 했거든요. 지금도 그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집사람이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시장보러 갔다가 몇 천 원 남겨왔다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정말."
기사는 기분 좋아서 택시요금을 안 받겠다고 했다. 나는 오히려 기본요금에 1천 원을 팁으로 주고 내렸다. 참 기분 좋은 하루였다. 그렇다. 말하자면 나는 일하기 위해서 집권 여당으로 간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왜 봉두완이가 야당으로 가서 TBC 때처럼 국민의 편에서 싸워주질 않느냐고 했다.
여당 안에서 야당을 하겠다고, 호랑이를 잡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유세 때 사자후했건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12대 국회가 끝날 무렵 문민 시대가 왔음을 선언하며 나는 그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꿈만 같은 일이었다.
TBC가 없어진 이듬해 3월25일에 치른 11대 국회의원 선거 때 나는 수만 명이 모인 유세장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나에게 마이크를 돌려주세요. 빼앗긴 마이크를. TBC <뉴스 전망대>에서 잡았던 그 마이크를 돌려주세요. 국회에는 또 다른 큰 마이크가 있대요. 그걸 저에게 넘겨주세요. 유권자 여러분. 죽어도 국민 편에서 여당 속의 야당이 되겠습니다."
"그래 국회에 가서 잘해봐! 확 밀어줄 테니까."
주로 우리가 동원한 군중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선거 운동이 본격화하기 전 민정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은 전선에 나가는 일선 장병처럼 국회의원 출마자들을 모아놓고 엄숙한 어조로 격려하며 약속했다.
"이번 총선에서 누구든지 전국에서 표를 제일 많은 받는 사람을 당 사무총장을 시킬 거예요."
마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을지무공훈장이라도 주겠다는 식이었다.
그해, 1981년 3월 25일 서울 용산.마포 지역 11대 국회의원 총선 결과 나는 여당 후보로는 사상 처음으로 무려 16만 표를 얻어 전국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그 바람에 인기 최고의 영화배우 신성일 후보는 5만여 득표에 그쳐 아깝게 낙선하고 말았다. 그는 호적상 본명이 '강신일'이었는데, 잘 알려진 자신의 예명을 살리기 위해 '강신성일'로 선거홍보물에 기재하다 보니 유권자들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한 것 같았다. 거의 20년 후 그는 고향 대구에서 한나라당 간판을 들고 나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총선이 끝나고 당직자 발표가 있을 무렵 <조선일보> 한구석에는 경북 안동 지역구에서 당선된 권정달 씨가 불평에 가까운 말을 한 것이 보도되었다.
"아니, 그럼 우리처럼 유권자가 얼마 안 되는 지역에서 표를 다 모아 봐야 얼마나 됩니까? 지역마다 특성도 있고 득표율이 얼마냐가 더 중요하지요." 그러고 나서 그는 당직 개편에서 당 사무총장이 되었고, 나는 당 대변인 겸 당무위원이 되었다.
허화평, 허삼수 등 신군부 실세들은 나를 위로하면서 사무총장이나 당 대변인이나 그게 그거라면서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그들은 그냥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사람을 언제나 편안하게 만드는 비결을 갖고 있었다. 아마 속으로는 '이 사람 참 웃기네' 했을 것이다. '아니, 말이야 바른대로지 우리가 목숨 걸고 얻은 정권을 형님 같은 코미디언한테 덜렁 맡기란 말이야?'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당시 군 출신들은 이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 군 중심으로 똘똘 뭉쳐 안보를 강화하고 일사불란한 체제로 국력을 신장하겠다는 신념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부자유, 어느 정도의 인권침해, 어느 정도의 독재는 국민들이 너그럽게 봐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었다.
나의 순진한 생각으로는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아래로는 사무총장, 원내총무, 실무국장, 심지어 연수원장까지 군 출신 일색으로 국민 앞에 낙서기보다는 나 같은 민간인 출신들이 앞장서서 5,6공화국을 이끌어 나가는 게 합당한 순리였다. 또 그게 국민들의 지지를 지속적으로 받아내는 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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