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시인·아동문학가 (경기문학인협회장·경기산림문학회장·수원예총부회장)

정명희 시인·아동문학가 (경기문학인협회장·경기산림문학회장·수원예총부회장)
정명희 시인·아동문학가 (경기문학인협회장·경기산림문학회장·수원예총부회장)

하늘이 맑다. 그런데 마음이 찌뿌듯하고 몸이 무겁다. 언제부턴가 며칠 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몸이 먼저 말해 준다. 뜻하지 않은 사고가 긴 후다. 한라산 등반을 하다가 미끌어져서 크게 다쳤다. 의사는 교통사고가 났느냐고 물었다. 복상씨 부근의 뼈가 부서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 시절 여러 가지 연유로 마음이 불편하고 일도 많아 쉬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등산도 일종의 휴식이라 생각하며 나섰었다. 

내 몸을 잘 몰랐던 만용이었다. 생각은 다른 곳에 있고 걷기를 싫어했던 내게 맞지 않는 불편함이 기어이 큰일을 내고 말았다. 

눈이 쌓인 한겨울 산에서 내려 오면서 길옆의 화산석에 미끄러져 제대로 부딪혀 버린 것이다. 이후 후유증이 생겨서 20년이 지났는데도 비가 온다는 기미만 있으면 정신없이 잠을 잔다거나 움직이기가 싫어진다. 우울함도 동반한다.    

그런 자신이 싫어서 저녁 무렵이 되면 지인들과 약속을 잡는다. 그렇게 하다 보니  일기예보를 살피게 될 수밖에. 

비가 내린다는 날 약속을 잡는 것은 재미도 있다. 사람들은 비로 인하여 하던 일을 멈추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였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본다.

마약같은 비가 내리는 저녁 거리를 걷다 보면 음식점에 삼삼오오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냥 지나치려 해도 눈길이 간다. 무엇이 즐거운지 웃기도 하고 심각하게 앉아 무슨 이야기인지 숙연하게 듣기도 한다. 그 가운데 찌개와 고기 굽는 냄새는 야릇하게 기분을 상승시킨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의 생각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함께 합석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까운 동생이 다음 수요일에 비가 온다며 그동안 못 만났던 미팅을 하는 게 어떠냐고 건의를 했다. 고마운 일, 비에 대한 사람들의 습성을 알기에 딱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 명 정도의 멤버를 구성하여 초대를 하지만 빠지는 사람 없이 다 모일 수 있다. 그 이유는 너무나 잘 안다. 비가 오는 날 무거웠던 부분들을 총체적으로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은 만남뿐이라는 것을. 그것을 잘 아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되는 것이다. 만남의 펑크가 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날까지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성사가 잘 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요리하면 된다. 그들이 조금 늦게 오면 되고 우리는 기다리면 되니까.

생각만 했는데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사르르 눈이 녹는 것처럼, 아님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게 녹아 버리는 기분이다. 문득 생각이‘사르르’에 꽂힌다.

천천히 녹아들거나 부드럽게 스며드는 상태, 따뜻한 감촉, 은근하게 퍼지는 감정, 부드럽게 흐르는 상태, 이런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아, 어떤 한 사람에게만이 아닌 다중의 사람들과‘사르르’녹아버리는 기분을 가진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비 오는 날 모임을 통해 ‘사르르’에 취하며 기분을만끽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어느 시인이 잘 쓰는 말이 생각난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행복하다. 비 오는 날의 만남은 그 기분을 제대로 충족시키는 우리 인간들의 향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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