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리본으로 만든 꽃 한 송이가 형광등 빛에 반짝이며 활짝 웃는다. 다른 꽃을 접어 만들어 함께 걸어두려고 리본을 꺼내기 위해 서랍을 연다. 수년 전부터 리본 테잎을 사서 모아 두는 습관이 있다. 문구 할인점에 들를 때마다 하나씩 사서 모은 리본 테잎이 서랍에 꽉 찼다. 
언제든 원하면 꺼내서 포장하는데 장식으로 쓰기도 하고, 오늘처럼 꽃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한다. 나에게 리본은 사치라기보다는 위로를 주는 친구와 같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성큼 들어오려는 바람이 제법 선선한 초겨울 아침, 이사를 하고 있었다. 두 자매가 사는 사택 2층, 늘 계단을 뛰어 오르내렸었다. 그러다 환갑을 넘긴 언니가 발을 접 질러 깁스를 하고 나니 2층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부모님 댁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은 물건들을 조금씩 옮겨놓았다. 그런대 우리 두 자매가 침대 매트리스는 너무 무거워 턱없이 힘이 모자랐다. 순간, 이동에 도움이 될 도구를 찾다가 서랍에 있는 두꺼운 천 리본이 생각났다. “옳지! 그것이라도 써 보자” 무거운 매트리스를 간신히 말아서 길게 자른 리본을 세 군데에다 묶고 그 리본 매듭을 잡아당기니 제법 쉽게 움직거린다. 방을 나와 계단으로 밀고 내려왔다. 문 밖에 세워 둔 차에 간신히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 집 도착. 엘리베이터 까지 운반하느라 용을 쓰고, 아파트 현관에 도착해 남은 힘을 다해 밀어 넣었다. 거기서부터는 방까지 수월하게 옮길 수 있었다. 
   
  묶었던 리본을 풀고 보니 구겨지고 땅겨져 화려했던 리본이 초라해졌다. 외모가 상했으나 큰일을 해서 주인을 도왔으니 리본은 리본의 사명을 다 했다. 선물 박스에 장식으로 묶여서 예쁘게 꾸며주는 리본인데, 아니면 머리띠나 옷에 브로치로, 치장하는 데 쓰임 받을 리본인데, 오늘 우리가 무겁고 덩치가 큰 매트리스를 옮기기 위해 묶고 당겼더니 구겨져 볼품이 없어진 리본 테잎. 며칠 전 바람이 많이 부는 날, 후배가 종이 쓰레기를 잘못 버려 동네 큰길에 날아다니는 것을 본 할머니가 나를 꾸짖었던 일이 갑자기 스치고 지나간다. 그때 당한 수모로 마음이 상해 구겨진 리본처럼 얼굴이 구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의 얼굴이 얼마나 볼품 없었을까.

 그러나 리본의 쓰임새는 주인이 정하는 것이고 주인의 마음에 맞게 쓰이는 것이 최선이다. 즉 일꾼의 쓰임새도 똑같이 주인이 정하는 것이고 주인의 마음에 맞게 쓰이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받은 댓가와 결과물이 값진 것이다. 화려하고 멋진 선물 박스에 장식으로 쓰이는 것이 리본의 용도인 것은 맞다. 그러나 때로는 묶이고 당겨지고 구겨지더라도 꼭 필요한 곳에 쓰여 졌다면 볼품없게 되더라도 주인은 정말 고맙게 생각할 테니까. 그 가치는 얼마나 귀한 것인가. 마치 후배의 실수를 대신해 수모를 당함으로 그 후배가 그 순간을 잘 넘겼던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이처럼 리본과 같이 본래의 목적과 다르게 사용되어지는 물건들이 많다. 책받침이 무더위로 흐르는 땀을 식혀 주는 부채로 쓰인다거나, 예쁜 커피 잔이 화분으로 쓰일 때도 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내가 타인이 생각하는 내가 아니듯 나의 가치와 남이 생각하는 나의 가치가 달라 목적이 다른 일에 쓰일 때가 종종 있을 수 있다.     세상의 가치로는 일등이 되라, 멋진 삶을 살아야 성공한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주문한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은 내 몫이고 때로는 자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만나는 부조리한 경우에도 내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더 큰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일이다. 나아가서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의무를 다하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누구에게도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고 일을 수행하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설령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내가 원하는 자리와 가치대로가 아닌 곳에 있다고 해도, 오늘 무거운 매트리스를 옮기는 데 쓰인 리본처럼 나의 쓰임새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 주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게 쓰이고 있는 것 아닐까. 

  혹시 지금 억울하고 부당하게 취급 당하고 있다거나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사람이 있다면, 주인의 목적대로 잘 쓰이고 있음을 상기하고 존재의 가치를 잃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리본이 장식용이 아닌 힘쓰는 곳에 쓰여 주인의 시름을 덜어주고 주인을 기쁘게 한 것처럼 나를 통해 누군가가 희망을 찾고 잃었던 용기를 다시 찾는다면 나의 희생은 값진 것일 것이다. 

  이사를 마친 후,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아파트 앞 도로에 퇴근하는 차들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줄서 이있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꽤 흘러 저녁도 거른 가족들이 저녁상을 차린다. 나는 방에 남아, 이삿짐 사이 얼굴을 내민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색색의 리본들이 뒤죽박죽 섞여있었다. 리본을 다 꺼내어 다시 서랍에 색과 크기와 모양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구겨진 리본은 잘 펴서 꽃 한 송이 만들어 머리 맡 커텐에 매달아 놓았다. 


김영희 수필가
김영희 수필가

약력

2025년 문학과비평 신인상 수상

문학과 비평 회원

아주문학 회원

 

저작권자 © 서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